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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fovator Jan 24. 2022

ep05. 어떤 분위기는 맛이 된다

뉴욕 버거 조인트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당시 우리가 묵었던 도미토리 1층 로비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커다란 전신 거울이 달려 있었다.

거울 앞에 서서 몸을 좌 우로 돌려도 보고, 캡 모자도 깊숙이 눌러써보았다. 그리고 발뒤꿈치를 들어 신발 옆태도 살펴보다가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나는 이 멋지고 커다란 뉴욕이라는 도시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싶었다. 최대한 여행객스럽지 않게 보이지 않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도미토리에 도착하자마자 빵빵해서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내 몸집만 한 캐리어를 뒤적거렸다. 이 옷, 저 옷을 몸에 대보며 제이슨에게 뭐가 가장 '뉴욕스러워 보이는지'를 신나서 연신 되물었다. 고민 끝에 조거 팬츠에 빅사이즈 티를 헐렁하게 입고 검은색 캡 모자를 이마에 살짝 걸쳐 썼다.


'New York state is mine.'

에어 팟을 귀에 꼽고 있지 않았는데도 둔탁하면서도 경쾌한 드럼 비트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스케이트 보드라도 옆구리에 하나 걸치고 있으면 뉴욕 거리의 시티 보이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참, 뉴욕 햇살은 따가우니까 선글라스도 하나 걸쳐야지' 싶어서 레이밴 선글라스도 챙겼다. 물론 티셔츠 목에 살짝 걸어 놓았다. 하지만 얼마나 우스운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누가 봐도 설레는 표정의 관광객이었다.

아무렴 어떠한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뉴욕이다.


도미토리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목을 젖혀 위로 올려다봐야 하는 빌딩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내 나이키 운동화 발끝에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의 숙소는 문을 열자마자 바로 도보였다. 수많은 뉴요커들과 관광객들로 뒤섞인 행인들이 각자의 행선지를 향해 걸으며 얽히고설켜 있었다. 뉴욕의 공기는 서울의 그것과 다를까 싶어서 눈을 감은 채로 햇살을 받으며 ‘스읍-‘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후우-'하고 뱉어도 보았다. 배가 고프다며 빨리 가자고 제이슨이 나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무드도 없는 놈'이라고 말하며 재빨리 그를 뒤쫓아갔다.



여기서 왼쪽으로 갔다가 저-기 보이는 저 회색 빌딩에서 오른쪽으로 틀고 쭉 직진했다가 다시 좌측으로 돌면 나온다며 제이슨은 지도도 보지 않고 나를 이끌었다. 지도도 없이, 그것도 서울도 아닌 뉴욕을 마치 오랫동안 살았던 본인의 동네 마냥 성큼성큼 걸어가는 제이슨이 신통방통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뉴욕은 도시계획 상 동서로 뻗는 길을 Street, 남북으로 뻗는 길을 Avenue로 구분하여 구획을 지칭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원리만 파악하면 가보지 않은 곳이라 한들 누구나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내 눈에 비친 제이슨은 맨해튼을 제 손바닥처럼 꿰고 있는 뉴요커 같았다.



제이슨은 길을 걸으며 약간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Heath! 뉴욕에는 셰이크 쉑, 파이브 가이즈, 그리고 버거 조인트 이렇게 3대 버거 맛집이 있어. 오늘 점심은 우리가 뉴욕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식사잖아 그렇지? 뭔가 특별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아까 말한 3대 버거 맛집 중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널 데려갈 거야. 아 물론 나머지 두 군데도 다 다녀갈 거니까 걱정 마" 제이슨은 성큼성큼 걸으며 각 버거집의 특징을 하나씩 설명해줬다.



"엥? Jason 여기는 버거집이 아니라 호텔 아니야?"

제이슨이 안내한 건물에는 입구 벽면에는 '르 파커 메르디안 호텔 (Le Parker Meridien Hotel)'이라는 파란색 LED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제이슨은 씩 웃어 보이며 여기가 맞다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호텔 1층 로비를 지나서 바로 좌측에 작은 통로가 하나 보였다. 그 골목 같은 통로 끝자락 벽면에는 이름도 없이 햄버거 모양의 네온사인 간판만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호텔 안에 햄버거집이?' '호텔'과 '버거'라는 단어를 붙여보니 뭔가 어색하게 느껴졌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인가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통로에 들어서니 역시 여느 맛집과도 같이 테이블에 공석이 나기를 기다리는 약간의 줄이 있었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고기 타는 냄새가 스멀스멀 코를 찔렀다.


긴 비행시간 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부실한 기내식과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한 위스키와 맥주 몇 잔, 그리고 땅콩 스낵이 전부였다. 줄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냄새는 더욱 짙어졌다. 기분 좋은 고통스러움이었다.


제이슨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이 정체모를 신비한 버거집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여기가 바로 아까 말한 3대 버거집 중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곳인 '버거 조인트'라고 소개했다. 아까 보았듯 이름도 없이 햄버거 모양의 네온간판 하나로 시작한 브랜드인데 로컬 주민들과 호텔에 투숙하는 전 세계의 관광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불길 번지듯 금방 유명세를 탄 곳이란다. 버거 조인트는 르 파커 메르디안 호텔 메인 셰프가 메뉴를 직접 개발하고 식재료도 꼼꼼하게 직접 검수하여 들여온단다. 그만큼 맛에 대해 굉장히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손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하는 깐깐함이다.


하지만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공기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는 냄새에서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틀림없는 뉴욕 최고의 맛집임을.



드디어 입구 안으로 들어왔다. 으레 호텔 안에 있는 버거집이라고 하면 으리으리한 넓은 공간에 고급스러운 사이니지와 식재료의 원산지부터 옵션까지 길게 쓰여 있는 스크린 메뉴판, 그리고 정갈하게 갖추어진 직원들의 유니폼과 우아한 음악과 깔끔하게 정돈된 테이블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이곳 버거 조인트의 공간은 생각보다 작았다. 벽면에는 뮤지컬 포스터부터 오래된 영화와 잡지 포스터가 듬성듬성 끝쪽이 살짝 떼어진 채 너덜너덜하게 붙어있었고 여러 색상의 두꺼운 유성펜으로 쓰인 낙서들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이곳을 다녀간 손님들이 한 낙서들이었다. 영어 외에도 드문 드문 다른 나라의 문자들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지저분해 보이지 않고 되려 멋져 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는지 상상하면서 먹기도 전에 햄버거 맛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천장에서부터 길게 떨어지는 전구는 어두운 주황빛 불빛을 쏟아내며 은은하게 아늑한 이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봤던 시골 동네의 레스토랑에 있는 그것처럼 굉장히 투박한 디자인이었다. 주방의 공간은 밖에서도 볼 수 있게 뚫려 있었다. 그 안에서는 딱히 유니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검은색과 흰색의 드레스 코드만 맞춘 것처럼 보이는 자유로운 차림의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옆에는 박스를 잘라서 만든 것 같은 투박한 하드 판 지가 붙어있었다. 그 위에는 큼지막한 손글씨로 글자의 테두리를 그리고 그 안의 공백을 형형색색의 사인펜으로 칠해놓은 글이 쓰여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버거 조인트의 메뉴판과 주문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출처: https://www.afar.com/places/burger-joint-at-le-parker-meridien-new-york


저 건너편에 이미 자리에 앉아 연신 "음..... 음!"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햄버거를 크게 베어 먹고 있는 멋진 백인 남성은 그의 붉은 턱수염에 소스가 묻은 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버거를 먹고 있었다. 넋이 나간 채로 그의 손에 들려있는 햄버거 안에 박힌 고기 패티 두께가 얼마나 두꺼운지 가늠하고 있는 사이 벌써 우리 차례까 되었다. 제이슨은 자신이 주문하는 것을 먼저 잘 보라며 시범을 보였다. 제이슨은 치즈버거와 일반 햄버거 중 하나를 고르고, 스테이크처럼 선호하는 고기 패티의 굽기 정도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토핑을 몇 가지 추가하고 감자튀김에 맥주를 주문했다. 제이슨이 먼저 주문을 끝내고 테이블로 이동하는 사이 직원이 내게 눈짓으로 인사하며 나의 주문을 기다렸다. 나는 그냥 같은 것을 달라고 이야기했다.



앉아서 이 공간이 주는 무드와 분위기에 식욕이 한껏 도드라질 무렵 어느새 우리가 주문한 버거 세트가 나왔다. 투박하게 생긴 햄버거의 번에서 은은한 버터향이 고기 탄내음과 섞여서 코를 찔렀다. 그 향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체다치즈의 꿉꿉한 향과 섞이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양손으로 버거를 베어 먹기 쉽게 위아래로 살짝 눌러 움켜쥐고는 황홀한 첫 입을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번이 으깨지면서 야채가 제일 먼저 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고 토마토즙의 풍미가 먼저 입안을 상쾌하가 감싸고돌았다. 이내 찐득한 치즈를 거쳐 뜨거운 육즙이 흘러나오는 소리와 함께 고기 패티를 앞니가 깊숙이 찔렀다. 햄버거가 이렇게 입 안에서 녹아내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눈을 희번덕 뜨고는 제이슨을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맛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맛이 잊히질 않는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맛이 생각날 때면 종종 미국식 수제버거집을 찾아간다. 요즘은 워낙 인기인지라 꼭 이태원에 가지 않더라도 그럴듯한 버거집이 어딜 가나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당연히 너무 맛있다. 어찌 맛있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상하게 뭔가 부족하다. 그때 버거 조인트에서 먹었던 버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재료들과 두터운 고기 패티도 비슷하다. 그런데 왜 그때 그 느낌이 나지 않는 것일까?


며칠 전 수제버거를 먹으며 아마도 버거 조인트라는 신선한 충격은 맛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공간, 제이슨과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는 설레는 그 마음가짐, 이곳이 바로 뉴욕이라는 생각에 두근거리던 가슴, 입구 앞에서 줄지어 서있던 각양각색의 다양한 인종들, 귓속에 박히는 알 수 없는 영어 단어들. 그리고 어두운 공간을 은은히 비추는 주황빛 조명과 벽면을 가득 채운 낙서와 포스터들, 분주히 움직이는 직원들과 콧구멍 깊숙한 곳을 찌르던 고기와 기름 냄새, 오감을 자극하던 그때의 분위기가 맛있었던 것은 아닐까?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어떤 분위기는 맛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난 아직도 그날의 충격적인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립다, 버거 조인트.

그립다, 뉴욕.

그립다, 나의 친구 J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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