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테일 아포칼립스? 오프라인 리테일의 종말과 진화
뉴욕 맨해튼의 West 56th street의 버거 조인트에서 아주 만족스러운 첫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우리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바로 5th Avenue.
5th Avenue는 흔히 '뉴욕에서의 쇼핑'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언급되는, 소위 말해 '명품거리'로 유명하다.
혹시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을 봤다면, 여자 주인공역을 맡은 오드리 헵번이 귀금속 매장 앞에서 빵과 커피를 들고 보석을 구경하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그렇다. 그 전설과도 같은 영화에 나왔던 보석 샵이 바로 5th Avenue에 위치한 브랜드 '티파니'의 스토어다.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이 막을 올린 지 벌써 6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티파니'는 터줏대감처럼 이곳에 당당히 위치해있다.)
5th Avenue에는 '버그도프 굿맨', '헨리 벤델', '삭스 피프스 애비뉴' 등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백화점이 모두 포진해있었다. 그뿐일까? 앞서 언급한 브랜드 '티파니', '구찌, '프라다', '루이뷔통' 등의 명품 브랜드부터 시작해서 '애플스토어', '나이키 랩', '디즈니스토어', '레고', 'M&M' 등 분야를 막론한 온갖 리테일러들이 이 구역에 들어서 있다. 다시 말해 5th Avenue는 전 세계의 오프라인 리테일 1번가이자 역사와 전통을 가진 브랜드부터 트렌드 리딩을 하고 있는 핫한 브랜드들의 표본실이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전 세계의 관광인구와 트렌드의 중심에 서있는 뉴요커들의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는 5th Avenue의 임대료는 대체 얼마 정도일까?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비싼 구역인 록펠러 센터에서부터 센트럴 파크까지의 49번가~60번가에 위치한 건물들의 평균 임대료를 기준으로 답해보겠다. 놀라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고 읽길 바란다. 이 구역의 평균 임대료는 제곱 피트당 연 3,000달러를 육박한다. 한화로 환산하면 대략 1평에 1.2억 원 수준이다. 10평이면 12억 원. 100평이면 120억 원이 한 달 임차비용으로 소요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수많은 브랜드들이 천문학적인 수준의 비용을 감당하면서까지 5th Avenue에 입점하지 못해 안달일까? 아무리 트래픽이 많은 곳이라 해도 일반적인 브랜드의 객단가와 구매전환율을 고려했을 때 BEP를 넘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수익을 목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손해를 보면서도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는 것. 5th Avenue에 오프라인 스토어를 유지한다는 것은 브랜드 관점에서 투자이자 브랜딩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진정한 뉴요커들은 바깥세상의 정보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뉴욕에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흥미로운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지미 브레슬린-
"우와... Jason, 여기 진짜 별천지다..."
하나라도 놓칠까 봐 좌우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5번가에 위치항 온갖 브랜드들의 사이니지를 훑으며 눈에 담았다. 그러다 좋아하는 브랜드가 보이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입점객들의 행동 패턴을 한참동안 서서 유심히 지켜보기도 했다.
Jason과 나는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듯, 리테일과 긴밀하게 연관된 국내 대기업에 Sales & Marketing 직무로 함께 입사하여 알게 된 동기였다. (당시 jason은 기존 회사를 떠나 브루어리 스타트업에 다니다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시점 기준 뉴욕의 스포츠 리테일 브랜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에는 기존 회사를 잘 다니다가, 현재는 그곳을 떠나 국내 IT에 기반을 둔 브랜드의 커머스 부문에서 같은 직무의 일을 하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아니, 아는 게 고작 이거라서 그랬던가? 뉴욕까지 와서, 5th Avenue를 걸으면서도 우린 이런 이야기들을 주구장창 주고 받았다.
'기껏 여행지까지 와서 일 얘기를 하다니...'
우리는 이런 서로가 어이없었다. 하지만 그게 또 싫지는 않았다. 리테일 브랜드들의 꿈의 장소이자, 글로벌 브랜드가 한데 모인 박물관과도 같은 뉴욕의 5th Avenue. 이곳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배움이자 기회의 장이었다.
여행이란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찾아 떠나는 일이다.
-미셸 프루스트-
하지만 2019년쯤이었던가? '뉴욕 명품거리 폐점 급증... 임대료·최저임금 급등, 온라인 쇼핑 확산이 원인'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천정부지의 비싼 임대료에도 꿈쩍 않던 5th Avenue의 입점 브랜드들의 폐점이 급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충격이었다. 랄프로렌에 이어 GAP이 5th Avenue에 위치해있던 플래그십 스토어를 폐점했단다. 명품 의류 브랜드 베르사체도 철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신문기사에 첨부된 사진에는 텅 빈 매장 안에 오래전 배포하다 남은 할인판매 전단지가 흐드러져 있었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멋지게 걸려있던 간판이 떼어진 자리가 황량했다. 그토록 ‘부산스럽던’ 5th Avenue에 '을씨년스럽다'라는 수사가 따라붙는 것이 어색했다.
기사에 따르면 아마존 같은 온라인 리테일 업체들의 성공으로 인하여 오프라인 소매점포들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 코로나가 쓰나미처럼 5th Avenue의 오프라인 점포들을 덮쳤을 것이다. 산 넘어 산, 엎친데 덮친 격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리테일 아포칼립스'라고 칭한다. 이는 미국의 대형 유통기업들이 오프라인 채널을 대거 축소하고 파산보호를 줄지어 신청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출몰하는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리테일러들은 늘 그랬듯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급격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이에 대한 소비자들의 적응. 그리고 온라인 유통업체들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인한 구매패턴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오프라인 채널만이 갖출 수 있는 유일무이한 매력들이 있다.
제품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만져볼 수 있다는 점, 물리적 공간을 점유한 커뮤니티 안에서 고객들과 직원들이 상호 교류하는 경험들, 쇼핑공간보다는 전시회 혹은 쇼룸에 가까운 브랜드 체험 위주의 공간기획 등.
이처럼 위기 속에서도 5th Avenue는 살아있는 생물의 역사처럼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세상은 변했다. 그리고 더 빠른 속도로 더 거대한 규모로 변화할 것이다.
내가 별천지라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감탄을 금치 못하던 5th Avenue. 그 안에 속한 브랜드들은 마치 운석 충돌과도 같은 재난수준의 상황을 피치 못했다. 그 중 거대한 일부의 공룡 브랜드들은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새로운 종의 꽃은 피고 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무엇을 변화시키고 무엇을 지켜낼 것인지에 대한 철저한 고민 끝에 더욱 크게 성장하는 오프라인 리테일러들이 5th Avenue에도 분명히 있다. 여전히 5th Avenue에서 자리를 유지하는 애플스토어나 디즈니스토어, 나이키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다음 장에서는 2018년 당시 나와 Jason이 5th Avenue에서 발견한 살아남는 브랜드들의 변화의 씨앗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