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매개로 추억을 소장하는 매력
지난 연말 턴테이블을 구매했다. 술김에.
계획된 구매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충동구매도 아니었다.
사실 턴테이블 마련과 LP 수집은 나의 오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꼭 빽빽하게 진열된 나만의 LP 장을 갖길 바랬다. 진열장에 꼿꼿이 서있는 LP 커버들의 모서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우둘투둘하게 훑는 느낌, 원하는 음반이 발견되면 조심스레 꺼내보는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턴테이블 위에 LP를 올려놓으면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선율과 진동, 그리고 그 분위기 속의 나를 상상하곤 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꽤나 오랫동안 숙성된 구매욕이었다.
턴테이블을 사게 된 그날의 경위는 이렇다. 때는 2021년 12월, 친구 집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과 와인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이럴 때 어떤 음악은 페어링이자 무드가 되는 법. 블루투스 스피커에 핸드폰을 연결해서 유튜브 뮤직을 틀었다.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선곡하여 플레이리스트에 담았다. 테이블 위 작은 무드등에서 촤르르 펼쳐지는 적당한 불빛. 나름 신경 쓴 와인잔을 부딪힐 때 공기에 퍼지는 청명한 소리와 출렁이는 붉은 빛깔의 와인. 그리고 가벼운 농담부터 시작해서 꽤나 무거운 이야기들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술과 음악을 곁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흘러가는 시간에 지금이 묻히지 않길 바랬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과 기분을 어떤 사물에 담아내어 소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그냥 이렇게 지나치면 기억 저편에 묻혀버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을 붙잡아 언제든 소환해낼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그것은 음악이었다.
왜 누구나 그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 우연히 걷다가 지나친 가게에서 들리는 음악으로 한동안 잊고 살았던 추억이 문득 되살아나는 그런 경험 말이다. 음악을 매개로 형체가 없는 그날의 추억을 물리적으로 소장하고 싶은 욕구, 그리고 나만의 취향을 아카이빙 할 수 있는 사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 생각의 끝에 오랜 시간 동안 묵혀온 버킷리스트, 바로 턴테이블과 바이닐이 자리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 음악을 물리적인 사물로 소장하는 경험은 너무도 당연한 일상의 한 조각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었다. 천 원짜리 지폐를 주머니 속 손에 꼬깃꼬깃 쥐어들고 동네 레코드샵에 가는 것은 늘 설렜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레코드샵에서 판매하던 정품 카세트테이프부터 역 근처 구석진 자리에 정품이 아닌 녹음테이프를 늘어놓던 어둠의 경로들까지. 그렇게 하나씩 모은 카세트테이프가 다 늘어질 때까지 듣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CD 플레이어로 트렌드가 바뀌었다.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보다 좋은 음질과 트랙 변경이 편리했기 때문에 용돈을 모아 CD를 사곤 했다.
신기한 것은 벌써 20년의 가까운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도 그때 어떤 음반을 샀었는지, 왜 그 앨범을 샀었고 그 노래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등의 추억들이 오래된 사진처럼 꽤나 구체적으로 또렷이 기억난다는 것이다.
중학교 3학년을 거쳐 고등학생이 되어서부터는 MP3를 듣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기기에 이렇게나 많은 음악이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하는 플레이리스트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그냥 핸드폰에 이어폰을 꼽고 음원사이트를 통해 스트리밍을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하드웨어의 용량 제약이 없어지니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뿐일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음질의 디지털 음원은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편리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남은 건 음악만 있을 뿐, 디지털 음원 시대부터는 내 모습이, 그때의 추억과 음악에 깃든 어떤 사연이 없다. 쉽게 소비되고 편리하게 들을수록 추억은 쉽게 망각된다. 아날로그 시대의 음악 감상이 보글보글 오랜 시간 끓여지고 졸여진 진득하고 깊은 맛의 된장국이라면, 디지털 시대의 음악은 자극적이고 편리하지만 너무도 쉽고 빠르게 식어버리는 패스트푸드 같다.
아마 나와 비슷한 세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이닐 레코드가 이제 와서 갑자기 2030세대에게 각광받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다. 디지털 음원이 쏟아져 나오고 공유와 구독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에는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잔향처럼 짙게 남는다. 물론 나와 같은 세대에게 바이닐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향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수'라는 단어를 쓴 것은 다소 모순적이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굳이 '향수'라고 표현한 이유는 LP를 수집하고 턴테이블로 음악을 감상하는 경험에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무엇'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왠지 모르게 익숙한 무엇'이 바로 음악을 매개로 하여 물리적인 추억을 소장하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카세트테이프나 CD를 구매하던 그때, 그 시절의 경험은 우리 세대에게 꽤나 익숙하다. 동시에 바이닐이라는 채널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매체이기에 새로우면서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코로나 때문에 집콕 생활이 익숙해진 우리에게 예쁜 턴테이블과 LP장에 조금씩 채워가는 바이닐 수집은 어떤 측면에서는 인테리어이자 신선하면서도 즐거운 취미이다. 어느 온라인 쇼핑몰의 판매 통계에 따르면 21년 기준 턴테이블 매출이 전년대비 30%나 증가했다고 한다. 과거 LP, 전축을 경험해본 장년층 세대인 4050 세대가 특히 두드러졌지만 2030 세대도 10%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판매량이 늘어났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개인적으로 자주 들르는 중고 LP샵의 사장님도 요즘 매장에 방문하는 손님들은 대부분 나처럼 젊은 사람들이라며 놀랍다고 하신다.
턴테이블과 LP는 손이 많이 가는 매체다. 턴테이블을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하는지, 호환되는 카트리지는 무엇이고 얼마 주기로 갈아줘야 하는지, 포노 앰프는 무엇을 써야 할지, 침압과 스테빌라이져를 사용해야 하는지, 바이닐의 소릿골이 망가지지 않도록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등등 생각해야 할 변수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LP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한다. 무언가를 소중하게 다루는 경험, 앨범 하나를 고르더라도 신중하게 그 아티스트에 대해 찾아보고 그 앨범에 담긴 트랙 전체의 서사와 메시지를 들여다보는 경험은 값지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음악과 연관된 추억들이 늘어가는 LP 커버에 묻은 손때만큼 겹겹이 쌓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과 추억을 물리적으로 소장하고 이를 언제든 소환해내는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어느 날 문득 "치지직" 바늘이 바이닐을 긁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어떤 노래의 한 소절에서 잊고 지내던 그날의 기억들이 음악과 함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면 어떨까?
"그땐 그랬지"하며 나만의 역사를 뒤돌아 볼 수 있는 여유와 낭만.
LP가 아니라면 결코 누릴 수 없는 무엇이다.
P.S. 현재까지 내가 소장 중인 바이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