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쓰기로 했다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 왔다.
더운 여름이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때.
이상하다.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가을 냄새가 스미는 날씨가 되면 괜스레 마음이 서운해진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퇴근길 차창 너머로 비친 풍경이 대낮처럼 밝았었는데..."
붉은 노을빛이 가을 하늘을 스멀스멀 감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왠지 모를 상실감이 마음을 콕콕 찌른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일 년의 2/3가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괜스레 지난 시간들을 기억 속에서 하나씩 헤집어 본다. 하지만 막상 생각을 해보려 하면 단숨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어떻게든 생각해내야 한다. 그렇게 한참을 꿈뻑꿈뻑 눈만 깜빡이며 골똘히 생각하다보면 뇌리에 박혀있는 순간 순간의 조각들을 조심스레 꺼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 "좋았다, 싫었다, 기뻤다, 행복했다" 등의 단어만 허공에 붕붕 떠다닐 뿐… 자세히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무엇 때문에 기뻐했고, 슬퍼했는지. 누구를 미워했고, 무엇을 좋아했는지. 어떤 순간에 누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내 옆에 있었으며, 우리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했는지...
그렇게 그때의 기억들을 하나씩 모아내서 맞춰놓다 보면 듬성듬성 빈 퍼즐처럼 되려 더 허전해진다.
지난 기억들을 잃어버리니 나를 그리고 시간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할머니께서는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가고 인생은 선잠처럼 짧다고 하셨었는데. 순간순간의 감정들과 기억들을 구멍 난 주머니 속에 가득 담아 줄줄 흘리고 다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전한 마음에 방 정리를 했다. 몇 년째 치우지 않았던 서랍을 열어서 하나씩 버릴 것들과 남길 것들을 구분해냈다. 그러다 보니 별의별 물건들이 다 나왔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끼리 주고받은 편지들. 누구는 내 옆에 남아있고 누구는 떠나갔다. 그때는 "이 녀석은 커서 뭐가 될까?" 했던 친한 친구 놈도 지금은 멋진 회사원이 되어 가족을 꾸렸다. 훈련병 시절 아버지가 써주신 편지도 있었다. 늘 강해 보였던 아버지가 이토록 나를 걱정하고 생각해주셨었구나. 그땐 몰랐었는데 꾹꾹 정자로 눌러쓴 아버지의 필체 한 자 한 자에 그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땐 그랬었지" 한참을 자리에 앉아서 추억에 잠겼다. 추억을 하나씩 곱씹을 때마다 입꼬리는 점점 위로 스윽 올라갔다.
가을밤. 다시 기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기도 좋고 편지도 좋다.
하다못해 메모장에 한 줄이라도 적어야지. 나와 내 주변을 잠시 돌아보고 그것들을 흰 종이에 담아내야지.
매일이 아니어도 좋다. 이미 많이 경험했지만 매일매일 적겠다는 다짐은 이내 부담감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하루라도 기록을 못하는 날이라도 오면 (알다시피 반드시 온다) 그냥 놔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서 또다시 콧구멍을 통해 들어온 차가운 가을바람이 가슴속을 휘 저속 다닐 때면 차곡차곡 적어놓은 기록들을 다시 열어봐야지.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즐겁고 무엇 때문에 슬퍼했는지. 어떤 고민이 있었고 그 고민은 지금 나에게 어떤 무게인지. 그래서 결국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그렇게 글로써 하루하루 나를 지켜내기로 다짐했다.
가을이 선물해준 고마운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