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기타 동호회 모임 후 티 타임에서 나눈 주된 이야기의 주제는 어제 발생한 시청 앞 교통사고였다. 사고의 원인에 대한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사망 사고에 대한 소식은 늘 언제나 안타깝다. 그 누군가에겐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에, 특히 아무런 준비 없이 당한 죽음이기에 뭐라 위로할 말이 없어진다.
이러한 죽음에 비하면 질병이나 노화로 인한 죽음은 호사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반대로 겪어 내야 할 심리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피할 수 있기에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면 과한 표현이라 욕먹을지도 모르겠다.
한 인플루언서가 이 사고에 대한 의견을 SNS에 올려 문제가 되자 삭제했다. 이러한 죽음을 보면서 지금의 순간을 잘 살아야겠다는 내용이었지만, 남의 죽음 앞에서 내놓은 개인의 감정 표현이 독자들의 정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아픔을 통해 나의 행복을 찾는 이기심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거나 보이는 현상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면서도 난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가장 어리석은 자의 모습일 테니까!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It is better to go to a house of mourning than to go to a house of feating, for death is the destiny of everyone; the living should take this to heart. (전도서 7:2)'
초상집, 곧 장례식장은 어떤 명문학교 보다도 인생에 대해 바르게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아주 쉽고 정확하게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초상집이고 그 학교의 표어는 <죽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죽음의 속성 중에 하나인 예측불가능성(unpredictability)이다.
예외의 경우가 있긴 하다. 바로 암 환자인 경우다. 나의 시어머니도 6개월 시한부 선고 후 예측한 데로 69세 나이로 죽었고, 나의 아버지도 예측가능한 시기인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평생을 당뇨병을 앓았고 위암 수술도 이겨내신 분인데, 얼굴에 생긴 작은 반점 같은 것이 생기더니 피부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몇 번의 방사선 치료를 했지만 몇 달간 고생을 한 후 숨을 거두었다. 암진단을 받고서는 방문한 나와 남편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하셨는데,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셨다. 그 후로 기도를 할 때마다 "아멘"이라고 하셨다. 응급실에 가시는 날, 차 옆에서 "할렐루야" "이제 가면 언제 보니?" 라며 마지막 인사말을 했다. 평생 교회에 간 적이 없었기에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은 사뭇 놀라웠다. 죽음 앞에서 신을 찾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덕분인지 나의 마음의 짐이 좀 가벼워졌다. 예수님과 같은 날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말씀하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이 아버지에게도 적용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강도는 아니었지만, 자식 다섯을 키우면서 살아온 인생이기에 지은 죄가 한 둘이 아닐 테니 과언은 아닐듯하다. 그나마 천국에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곤 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인간의 육신은 없어져도 누군가의 마음에는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난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한 한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TED에서 듣게 되었다. 그녀는 동네 빈 터 공간에 'What will I do if I die?' (내가 죽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을 써 놓은 후, 사람들의 반응을 소개하는 강연이었다.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자 하는 일이 가장 귀중하고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 지금 오늘 내가 하는 일의 우선순위를 저울에 달아보게 하는 질문이다. 어찌 보면 오늘을 살아가면서 매일 던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난 질문을 바꿔 나에게 질문했다.
내일 혹은 6개월 후에 내가 죽는다면 오늘 난 무엇을 할 것인가?
질문에 내일을 추가한 이유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고, 암진단을받았다고 한다면, 최대 6개월의 시간이 남아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 나온 타당한 질문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후회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떠오른 답은 의외로 '가족'이 아니었다. 내가 너무나 사랑한다고 생각한 가족. 그렇기에 그토록 고생하면서 희생하던 가족이 아니라니 놀라웠다. 오히려 내가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후회와 내가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크게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떠오르는 대로 적은 것이 나의 버킷 리스트다. 버킷(bucket)은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영어에서 kick the bucket(죽다)이라는 표현에서 기인된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적은 것이 거의 30여 가지나 되어 깜짝 놀랐다. 뭐 그리 아쉬운 것 없는 삶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하고 싶었던 많은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첫째는 귀 뚫기였다. 나이 오십이 가까워 올 때까지 귀를 뚫지 않고 있었는데, 그리 원했던 것이라기보다는 도전해보고 싶었다. 워낙 주사 맞는 것도 싫어하기도 하지만, 귀를 뚫는 것은 노예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고 나서는 망설였던 일이다. 첫 리스트에 오른 것은 나의 두려움과 편견을 깨고자 하는 마음이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난 중학생 딸아이가 시험이 끝난 날, 딸의 품에 안겨 소리를 지르며 귀 뚫기에 성공했고 그날부터 버킷 리스트 첼린지가 시작되었다.
버킷 리스트 첫 번째를 이룬 후 나의 마음 깊은 곳 무의식에 꽁꽁 숨어있는 작은 꿈들이 하나둘씩 빠르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너무나 예상밖의 것이었는데 바로 책 쓰기였다. 난 글쓰기에 관심도 없었던 사람인데, 느닷없이 책 쓰기가 나와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로부터 시작된 5년간의 삽질과 석사과정을 통해 이루었다. 물론 베스트셀러 작가와 같은 꿈은 없었기에 책을 쓴 것으로 만족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기쁨과 통찰과 경험의 가치는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값진 일이었다. 그 후로도 나의 삶은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이 계속 생기고 있다. 그중 아직 미래에 대한 바람 외에는 80% 이상이 이루어졌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삶,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아해했는데,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 제목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였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더욱 힘을 얻었고, 믿음의 생각이 성령의 도움을 받는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대학원 공부 후논문 쓰기,책 쓰기, 단기 해외선교하기, 딸과의 여행, 의료 통역사 시험 합격하기 등의 꿈이 이루어졌다. 이 외에 소소한 꿈도 있는데, 자동차 제네시스(Genesis)라는 이름이 좋아 적어 놓았을 뿐인데, 그 꿈도 이뤘다. 가격 차이가 있기에 그랜저를 구입하려다가 엔진 화재에 대한 염려로 제네시스 엔진을 달게 되었으니 이 꿈도 이루어진 셈이다.
난 쓰기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무의식에 있던 것을 의식의 세계로 옮겨 놓으니 뇌 기능이 자동화되는 뇌의 메커니즘 정도로 이해했다. 그런데, 요즘에서야 알게 된 것은 무의식 상자에서 의식 상자로 옮겨지기까지 과정은 나의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꿈꾸는 자'라고 형제들에게 조롱당한 요셉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 대한 구원 계획을 이루었듯이, 나의 작은 꿈을 통한 주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며칠 전 남편과의 대화내용이다.
나: 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남편: 아닌 것 같아...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보이는데?
나: 내일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굳이 똑같은 하루를 더 살고 싶지는 않아
꿈이 없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한 아버지... 나도 그분의 딸임이 분명하다.
사업을 하던 아빠는 늘 성공을 꿈꿔오셨다. 하지만 온전한 성공을 이루지 못한 미련으로 인생에 대한 아쉬움과 고생한 삶에 대한 자기 연민으로 죽기 전에 괴로워하셨다. 내가 보기엔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시고, 세계여행도 다녀 보신 아버지이지만, 해금강을 가보지 못한 것(내가 좋다고 말을 한 덕분에...)에 대해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은 늘 아쉬움만 남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떻게 인생의 모든 것을 가지며 지구 모든 곳을 다녀 볼 것인가? 물론 지구에만 머물기에는 만족함이 없어 화성에 까지 가고자 꿈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까지 살아온 삶만이 오직 나의 삶이다.
예전에 막내 동생이 대학시절 적어놓은 버킷리스트를 본 기억이 있다. 그중에는 번지점프도 있었는데, 참 위험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그 동생은 지금 3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 미국대학에서 뇌 과학자로 일하고 있는데 며칠 전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브레인 맵핑(brain mapping) 학회 발표를 위해 방문했다. 이 꿈을 이루었는지 물어보니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 국내에선 할 수 없어 뉴질랜드까지 가야 했는데, 지금은 이미 50대 초반이라 꿈도 꾸지 않는다고 한다.
어찌 보면 우리의 꿈은 남이 보기에 사소하거나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한번 해 보아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주어진 인생에서 모든 것을 다 해볼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내일 죽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늘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에 시도해 보자.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오늘 꿈을 꾸며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 언제 올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죽음을 준비하는 기본적인 태도다. 심지어 자살하기 위해 창문에서 떨어진 사람에게 맞아 죽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하여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오히려 현재 지금의 삶을 더욱 의미있게 살아가는 합리적인 삶의 방식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잠이 많은 난 여전히 자주 꿈을 꾼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할 지니라(전도서 5:7).
하지만, 나의 꿈은 헛된 망상이나 삶에 대한 집착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매일의 삶에서 느끼는 재미와 함께 삶에 대한 열정이 생기면서 내 생각대로 혹은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주위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난 꿈 꾸고 말하고 행하고 이루어내고 있기에 나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런데흥미로운 일은 새로운 꿈이 자꾸 생긴다는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지금쓰고 있는 <죽음 준비 십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