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구하지 말고 만족하자 Say Enough!
호흡 Breath
며칠 전, 개인 방송(U-tube)에서 <임종학> 강의를 들었다. 임종 바로 직전이 가장 힘든 시간이고 의료비용도 가장 많이 시용된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고 죽음은 당하는 것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강의의 요지다. 호스피스 병동의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현재 900여 병상이 있지만, 필요한 병상은 2500여 병상이라고 한다. 모르핀 투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호스피스 병원에서만 처방해 주는 모르핀은 마약관리 대장에 기록을 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일반 요양병원에서는 취급을 하지 않기에 진정 필요한 조치는 받지 못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죽기 한 달 전에 가장 많은 의료지출과 약물치료가 이루어지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시골의사라고 밟힌 한 의사는 왕진을 다니면서 임종 전에 뇌기능이 소실되면서 자연사를 할 분에게 포도당 주사, 즉 링거를 맞추면서 오히려 환자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신의 섭리를 거스리는 이러한 처방이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인지 댓글을 통해 솔직한 심경을 표했다. 강의를 잠시 들으면서 내가 왜 지금 이러한 글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써야 할 글의 방향이 더욱 명확해졌다.
강사의 말처럼 엄마도 임종 직전의 일주일이 가장 힘들었다. 엄마의 호흡을 관찰하고 지켜보면서 인간의 호흡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쉬는 숨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체인스톡 호흡(Cheyne-stokes breathing)으로 불리는 데, 숨을 몰아 내쉬었다가 다시 멈추는 간격이 불규칙적이다. 그리고, 코로 숨을 내쉬는 것이 아니라 거의 입을 크게 벌려 숨을 내쉬기에 호흡 자체가 아주 힘겹게 느껴진다. 요가수업 시간에 하는 복식호흡, 흉식호흡, 풀무호흡, 등 몇 가지 다른 방식의 호흡법을 강사의 구령에 따라 흉내를 내면서도 정작 그 중요성은 인식하지 못했다. 노래를 하거나 심지어 골프 스윙을 할 때도 호흡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 의식하지 않고 쉬는 숨은 실제 인간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인간을 인간답게 생명체를 생명체답게 해 주는 것이 숨(breath)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신(하나님, 하느님, 알라, 야훼 등으로 일컫는)이 인간에게 준 첫 번째 선물임을 기억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찾는 첫 걸음이다.
창세기( Gen ) 2장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7. Then the LORD God formed a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호흡은 단순한 숨의 의미가 아닌 생령, 살아있는 자의 본질이 된다. 숨을 멈추면 죽는 것이다.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 된다. 죽을 때 마지막으로 기능을 멈추는 장기가 바로 폐다. 호흡을 통해 자연스럽게 혈액 속에 있는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공기 중에 있는 산소를 마시면서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는 것이 인간의 호흡 방식이다. 하지만 폐의 수명이 다해지면 아무리 입으로 산소를 넣는다 해도 숨이 멈추는 시점이 온다. 그것이 마지막 호흡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서 언젠가는 마지막 호흡을 내쉴 때가 누구나에게 온다는 사실을 수시로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호흡이 멈추기 전에 우리 인간은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분의 존재에 경의를 표하고 순종해야 한다. 비록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지식으로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고 그 후에 심판을 하는 전지전능한 분이다. 인간이 창조주의 명령에 불순종한 결과 얻어진 죄 값이 바로 사망(죽음)이라고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로마서( Rom ) 6장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23.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로마서( Rom ) 8장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8. Those who are in the realm of the flesh cannot please God.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9. You, however, are not in the realm of the flesh but are in the realm of the Spirit, if indeed the Spirit of God lives in you. And if anyone does not have the Spirit of Christ, they do not belong to Christ.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0. But if Christ is in you, then even though your body is subject to death because of sin, the Spirit gives life because of righteousness.
더 큰 문제는 육체적인 사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둘째 사망이 있음을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Rev ) 20장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4. Then death and Hades were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The lake of fire is the second death.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15. Anyone whose name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 was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내가 엄마의 임종 전 후, 심리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시기에 이러한 글을 쓰도록 만든 동력은 바로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음의 키트를 통해 자신의 미래에 닥칠 죽음의 때를 예측하면서 오늘의 삶을 진단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이지만 필수적인 대비책이다.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유언장이나 <사전연명의료 요향서>, 즉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서류 작성에서 끝나지 않는다. 재산정리나 물건정리, 그리고 관계를 정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 영정 사진을 업데이트하고 음악을 준비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더중요하고 시급하게 준비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간들의 수명은 거의 1000년에 가까웠다. 아담은 930세, 아담의 셋째 아들 셋은 912세, 에노스는 905세... 무드셀라는 969세로 장수했다. 하지만, 이러한 장수는 노아의 홍수를 통한 하나님의 첫 번째 심판 이전의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죄(불순종)로 인해 수명이 현격하게 줄어듬과 동시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거의 없다. 무엇을 하면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기에 그들에게 장수가 축복이었는지 저주였는지는 판단할 길이 없다. 지금도 인간의 수명을 위한 연구와 노력은 계속되고 있고, 1000년 수명을 회복할 것을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꿈은 아마도 죽은 후의 영생(eternal life)을 통해서나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셀리 케이건(예일대 철학교수)은 영생에 대해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아무리 멋진 인생이라도 끝없이 반복되는 삶은 지루하고, 그러한 삶은 누구나 원치 않을 것이기에 죽음은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영생은 진시황제가 추구했던 육체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말한다. 하지만, 나와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란 육체의 죽음, 그리고 인생의 끝 이후에 이어지는 영혼이 지속되는 영생이다. 바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다른 삶(the other life)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 유한한 존재이고 그 수명(lifespan)은 평균 70-80세이고, 가장 간 수명(the longest span)은 120년으로 한정되었음을 성경은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시편( Psa ) 90편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0. Our days may come to seventy years, or eighty, if our strength endures; yet the best of them are but trouble and sorrow, for they quickly pass, and we fly away.
창세기( Gen ) 6장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3. Then the LORD said, “My Spirit will not contend with humans forever, for they are mortal ; their days wi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2022년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은 83세로, 남자는 80세 여자는 85세로 OECD 국가 중 2위다. 최근 보험개발원이 국내 생명보험 가입자를 대상으로 측정한 평균수명은 여성 90세, 남성 86세로 거의 5-10년이나 늘었다. 하지만, 건강수명, 즉 건강하게 살기를 기대하는 수명은 70세가 채 못된다. 2020년 건강수명은 70.9년이었고, 2022년은 65.8세로 5년이나 감소했다는 것은 한국인의 평균수명(average lifespan)은 늘었는데, 기대수명(life expectancy)은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결국은 노년기에 의료기관과 약과 의사에 대한 의존도로 인해 생명은 연장되지만,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을 추측하게 된다. 100세 보험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수명애 대한 기대가 커진 동시에 은퇴를 앞둔 장년이나 중년 혹은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의 경제적인 준비에 대한 관심과 부담이 증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100세 시대라는 이름의 광고로 수익을 얻는 사람들은 바로 보험과 투자회사 그리고 제약회사와 병원 등이다. 누군가 달려가면 덩달아 뛰어가는 모습(대중심리)처럼 우리는 수명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인해 진정 중요한 가치를 놓치며 살고 있는지 뒤돌아 봐야 한다.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 것인지... 그저 오래 살기 위한 노력 즉, 수명연장은 행복과 축복이 아닌 고통과 저주의 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100세 이상의 인구는 1만 명에 1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LA 캘리포니아 대학의 <노화학> 은 전 세계의 110세 이상인 사람인초백세(supercentenarian)를 조사하고 있다. 여러 확인 절차를 거쳐 이 기관에 등록된 사람은 약 70명이지만, 실제보다 자기 나이를 올리는 경향으로 인해 실제 숫자는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얼마 전, 100세가 넘은 김형석 교수의 장수를 축하하면서 방송과 출판사에서 떠들썩하게 홍보를 하는 것을 보면 아직은 백수하는 것이 일반적인 삶은 아닌 게 분명하다. 장수하는 그분의 식습관을 그대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분의 삶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일에 감사의 삶을 살아온 보이지 않는 영적인 건강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보인다. 나도 몇 년간 요가와 줌바댄스와 라인댄스, 골프와 산책등 다양한 운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젊었을 때보다 더 건강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에너지도 있고 자녀들이 성인으로 성장했기에 그들에 대한 걱정도 줄어들어 스트레스도 거의 없다. 모든 발병 요인의 15%는 유전이고, 85%는 생활 습관과 음식 그리고 운동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니 기저귀를 차는 시기와 고통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생활 습관과 음식에 신경 쓰고 운동도 꾸준히 해야 한다. 하지만, 육체의 훈련(physical training) 뿐만 아니라 영혼의 단련 즉, 경건의 훈련(godly training)이 더 중요하고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을 이루는 구성요소인 육신(육체)은 영혼과 하나이고, 살아생전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또한 현재의 삶과 다가올 삶, 즉 내생(the life to come)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1ti ) 4장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8. For physical training is of some value, but godliness has value for all things, holding promise for both the present life and the life to come.
인간의 구성요소를 몸과 영과 혼, 혹은 몸과 영혼, 혹은 몸과 영과 혼을 하나로 보는 철학적, 신학적 혹은 과학적인 관점이 다양하다. 나를 바라보면, 영과 혼과 몸,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존재 혹은 실존에 대해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삼위일체다. 그것처럼 나라는 존재, 혹은 실존에 대해 묵상하면 할수록 난 삼위일체로 구성되어 있음을 느낀다. 흙으로 가는 몸, 생각과 감정을 주도하는 혼, 그리고 내 마음을 온전하게 채워주는 영(하나님의 영, 곧, 성령). 물론, 철학적이나 생리적, 혹은 신학적인 논리나 이론은 아니다. 다만, 거의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수시로 기도를 하고 예배하는 나의 삶 속에서 얻은 통찰이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는 성령에게서 얻은 생각이다. 물론 앤드류 워맥 목사는 <영혼몸>을 통해 영과 혼과 몸에 대한 간단하지만 중요한 핵심을 다루고 있다. 크리스챤이 되면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은 연약하고 마음과 생각도 흔들릴 수 있다. 그렇지 않기위해서는 성령의 수도꼭지를 틀어 그 영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채워져야 한다는 논리인데, 어떻게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몸은 흙으로 가더라도 영혼은 살아 영생을 누린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의 근거는 물론 성경이다.
나의 '인생 매뉴얼'아자 '인생 내비게이션'인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 적힌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있다. 성경이 쓰인 시대와 문화 그리고 상황을 고려하면서도 말씀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성경을 유대인만의 역사나 그들의 신화라고 폄혜하는 진화론자나 사탄 혹은 이단 숭배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는 있지만, 나의 성령의 체험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인생은 자기 결정과 선택에 의해 운명을 만들어 간다고 믿는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영혼이 없다고 믿을 수도 있고 죽음은 몸과 함께 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셀리 케이건 교수처럼 인간을 바테리(battery)가 떨어져 멈추면 끝인 로봇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면서 나름의 논리를 피는 사람의 의견에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며 홍보하고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분명하게 물건이나 물체 혹은 물질과는 다른 존재다. 내 육체가 강해지고 내 생각과 감정(혼)이 안정되어 있더라도 마음 한가운데 뻥 뚫린 구멍을 느낀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이기도 하고 나 또한 그러한 마음의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성령으로만 채워지는 마음의 공간)은 내 영이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채워져야 하고 그럴 때 진정한 평안을 느끼는 것이다. 바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Joh ) 14장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7.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
로마서( Rom ) 8장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6. The mind governed by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governed by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이것이 채워진 상태가 영적으로 만족하는 상태이고 바로 '성령충만'하다고 말한다. 내 안에 있는 영성은 내가 호흡하고 있는 단순한 숨(breath)이라는 기능을 넘어 나의 실존(presence)을 보여주는 구성요소이자 나를 '크리스천'답게 해준다. 그러니 이러한 영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훈련(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 평안을 찾고자 요가를 시작했다는 요가샘에게 호흡과 관련한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두 권의 책을 가져와 읽었다. 호흡에 관련한 방법은 나름 의미가 있었지만, 그 안에는 평안을 찾을 길이 없어 보였다. <호흡의 힘>과 <하타요가의 호흡>이었다. 서두엔 창세기의 글도 인용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구약성경 창세기 2장 7절
또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세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결국 자신 안에 있는 신을 찾으라는 말이었고, 요가 스승을 찾아 복종하라는 말이었다. 내가 보기엔 근거도 없고 참 위험한 조언이다. 왜냐하면, 함부로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서도 안 되고, 아무나 따라가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호흡의 근원을 찾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책 어디에도 그러한 조언은 없다. 다만, 내 안에 있는 내재신을 찾으라고 조언을 한다. 어찌 보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내재신(내안에 있는 신)은 나에겐 성령이니까. 곧 내 안에 신이 있는 셈이다.
얼마 전에 한 강연에서 만난 70세(고희) 된 여인의 말에 의하면 칠십이 되는 올해 급격한 신체적 심리적 정신적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선배 언니에게 물어보니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꾸라지는 듯한 변화라고 말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생 70이라는 말에는 어떤 유전적인 혹은 영적인 섭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고희'는 당나라 두보의 시, 곡강에 나오는 인생 칠십 고래희의 줄임말로, 뜻은 '삶에 있어 칠십도 드문 일이다'라니, 인간의 수명에 대한 통찰이 깃들어'있음을 느낀다. 기타 동호회에서 만난 70세 된 지인의 어머니는 올해 100세인데, 아직은 스스로 화장실을 다닌다고 자랑을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직 큰 숙제가 남아있다면서 장모님은 92세라고 한다. 두 분 다 요양원에 계시는데, 앞으로 언젠가는 부모님의 죽음을 맞이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무거워 보였다. 옆에 계신 회장님도 엄마의 나이를 물으면서 본인의 아버지도 그 나이(87세)에 돌아가셨는데, 이제 본인의 나이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 살 날이 많지 않은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그러면서, 나를 위로하고자 팥빙수를 사 주셨다. 함께 골프를 치고, 노래교실도 다니는 우정언니는 자신의 엄마가 63세에 사망했는데, 내년이면 본인이 그 나이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죽기엔 너무나 젊은 나이임에는 틀림없다. 회원 대부분의 삶을 보면 은퇴를 하고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어 여러 가지 취미활동을 하고 있다. 손가락도 잘 움직여지지 않고 관절염으로 인해 빠른 손놀림을 할 수도 없다. 음표도 읽기 쉽지 않고 스트로크도 좋지 않은 데다 노래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연도 하면서 즐기는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때가 차면 우리는 천국 여행을 준비해야 한다. 그곳이 행여라도 지옥 여행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준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천국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에 관한 대화 가운데, 자연스럽게 안락사 이야기가 나왔다.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선 안락사가 합법적이기에 죽음을 앞두고 그곳으로 여행하는 관광객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은 '죽음'으로 짜인 일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닥터 데스(doctor, death)에 대한 칼럼도 소개를 해준다. 100세의 어머니를 둔 그 지인의 딸이 기자로서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그와 나눈 이야기가 실렸다기에 흥미롭게 읽었다. 닥터 데스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실제 의사로서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사람이 죽는데 앞장을 서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주어진 생명이 선물이 아닌 저주가 될 수가 있고, 당하는 죽음이 오히려 선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 직접 안락사를 시키지는 못했다고 한다. 인간의 목숨을 의도적으로 스스로 끝는다는 점에서 도덕적 윤리적인 논란이 된다. 따라서 법적인 권한을 부여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는 자살에 대한 논의로도 이어지는 문제이기도 하니까. 시골의사의 말처럼 신의 섭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사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삶일지 의구심이 든다. 반면에 삶이 괴롭다고 자신의 목숨을 앞 당기는 것 역시 신의 섭리에 어긋날 일이다.
욥기( Job ) 12장
10.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0. In his hand is the life of every creature and the breath of all mankind.
사는 것이 너무 괴롭고 괴로울 때, 특히 육체적인 고통도 심하고 앞으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을 때 우리는 '죽는 게 더 낫다'는 말을 하곤 한다. 나도 엄마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의 사망일 날, 주치의에게 산소공급을 중단해 달라고 했지만, 의료법에 어긋난다면서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로 인해 엄마의 사망 시간은 연장되었고, 그냥 그렇게 고통스럽게 숨을 쉬어야만 하는 엄마를 5시간 이상을 바라만 봐야 했다. 그로 인해 장례 절차도 늦어졌고 추모객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엄마를 죽이려고 했다는 말인가? 엄마의 몸은 이미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얼굴은 시체처럼 파래지는 청색증의 모습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산소를 공급하고 링거(포도당주사)를 맞추고 요도 항균제가 주입되고, 승압제(혈압을 올리는 약)를 넣는 처방과 치료를 하는 것이 의료법이라면, 법을 당장 바꿔야 한다.
의료법에 의하면, 인간은 살 권리가 있다. 하지만, 죽을 권리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산소공급을 중단하는 것이 '타살'이 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아주 기본적인 의료처치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셀리 케이건의 말에 의하면, 삶이 괴롭다면 그것은 신이 준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기에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살에 대해서 여러 철학적인 논리로 설명을 한다.
안락사의 문제와 의사조력사이 문제가 쉽게 결정 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도 타살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문턱에 있는 자에게 더 많은 의료처치라는 이름으로 이생 쪽으로 잡아당기면서 사망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법적으로도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심하게 손상시키는 큰 문제라고 본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병원에선 엄마의 임종면회를 허락했지만 난 그것이 '임종 면회'라는 것도 모른 채 그동안 방문하지 못한 가족과 친한 친척들에게 알렸다. 엄마가 원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죽어가면서 고통받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신장기능까지 멈춰 온몸이 부어있는 중에도 계속해서 링거를 통해 여러 가지 의약품을 투여하는 장면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병원에서는 도저히 엄마가 편안하게 죽을 수 없을 듯해 보여 집으로 모셔와 자연사를 하게 하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가정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알아보니 절차가 복잡하다. 우선, 112에 신고를 하면 경찰관과 119 대원이 방문한다. 사인을 알기 위해 국립과학수사대에서 검안의(검시관, 의사)가 나와 시체를 확인한다. 병원 밖에서 죽은 시체는 대부분 '변사체'로 취급하기에 타살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호자는 그동안의 치료 과정과 의료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한 절차가 끝나고 나서 사망을 확인 후, 병원의 장례식장에 전화해 구급차가 시체를 실고가 장례를 치를수 있게된다. 이런 과정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진통제를 어떻게 투여할 것인가였다. 게다가, 오빠가 아는 응급구조학과 의사와 통화를 해보니, 엄마의 경우엔 의사가 동행해야 한다고 한다. 가족 중에 의사가 있다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타살의 여부로 인한 시비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던 다음 날, 엄마는 사망하였다. 환자를 집에서 돌보는 시간도 쉽지 않지만, 사망 후 처리하는 과정도 고인과 보호자를 위해 좀 더 간편해져야 한다. 이렇게 집에서 사망하는 환자의 수가 외국에 비해 현저히 적다(20% 미만)고 하는데, 그 원인에는 이러한 법적인 절차도 한 몫하는 것이다. 기타 동우회 송자언니의 엄마는 아버지의 임종셔틀로 고생을 한 후, 자신은 집에서 죽겠다는 의사를 표했기에 가정사(home death)를 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금식을 했기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로 죽었고, 위에서 열거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호흡의 순간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괴로움을 견뎌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송자언니의 엄마는 현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뜻에 따라준 헌신적인 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기 의지(free will)를 표명했다. 타인에게 연명(delayed life)을 맡기지 않았기에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례식에 온 이모와 사촌 언니는 남편의 암투병을 간호하고 있는 중이다. 두 분 다 동일하게 말하길,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한다. 두 분다 크리스천인데,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천국에 대한 소망도 있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온 인생이기에 아쉬움이 없다는 말로 들렸다. 나 또한 이러한 말을 진심으로 하고 싶다. 이 정도면 충분해! 120년을 산다 할지라도 내 인생에 미련이나 꿈 혹은 비전이 없다면 굳이 더 오래 길게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까... 그럼에도 난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해와 달의 아름다음을 보면서 변함없이 성실하게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한다. 인생의 목적이 단순한 쾌락을 위하는 것이라면,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쾌락주의자들에겐 쾌락의 끝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영아 우리 집 현관 비번이 어떻게 되지? 공동 현관비번이 바뀐 바람에 예전에 사용하던 비번을 잊어버린 상황이다. 간호사인 딸이 놀라서 전화를 했다. 내가 치매에 걸린 건가해서 놀랬다고 한다. 아래 집 할머니가 문을 열지 못해 도와드린 경험이 있기에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현실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치매 환자가 더 이상 환자가 아닌 자연스러운 노화과정으로 인식되고 있고 주변에도 부모님의 치매로 인해 힘겨워하는 친구들도 늘어나고 있다. 약이 없는 병으로 알려진 치매로 고생하는 부모님이 실종되는 일도 종종 생긴다. 그러한 어려움을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엄마가 치매가 발생하기 전에 천국으로 떠난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엄마의 선택이다. 그저 80 평생 살아온 것으로 만족했더라면, 4년 간 임종셔틀을 타고 다니느라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노화가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되고 나아지고 회복될 것을 기대한 엄마의 기대와 어떻게 해서든지 치료하고 회복하길 원하는 자녀의 마음과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려는 의료인들과 이러한 삼위일체된 환경에서 떼돈을 벌려는 의료사업인들의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 합쳐서 만들어진 합작품의 모습은 그리 멋진 모습이 아니다. 주어진 인생에 대해 만족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러한 '죽음 사업'이 그리 판치지는 않을 것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고린도후서( 2co ) 3장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5. Not that we are competent in ourselves to claim anything for ourselves, but our competence comes from God.
사도행전( Act ) 14장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7. Yet he has not left himself without testimony: He has shown kindness by giving you rain from heaven and crops in their seasons; he provides you with plenty of food and fills your hearts with j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