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지혜 Mar 02. 2023

믿음의 이면

이면 (2023)


INFJ는 ‘손절을 잘한다’는 특징이 있다. 내가 MBTI에 열과 성을 다하게 된 이유 중 큰 주축이 된 부분이다. 돌이켜 볼수록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무서울 만큼 빠르게 파악했고, 선을 그었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다 떠나보내곤 했다.


나와 잘 맞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늘고 길게, 그리고 또 넓게 유지하는 편이었기에 그들을 더 잘 챙기기 위해서라도 그와 반대되는 관계를 미련 없이 정리해야 했다. 나름의 이유는 그러했다. 우정이 아닌 일로 만난 사이라면 어쩌면 더 칼같이 ‘사적으로 안 볼 사람’들을 분류했다. 딱 필요한 만큼 친절을 꺼내 썼고 예의라는 이름 아래 아슬하게 나만의 선을 유지했다. 그게 지금까지의 내 방식이었다.


나를 위한 일이었기에 단점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은 썩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 여긴 적도 있다. 그런데 하나 둘 예외가 생기면서 이런 내 성격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래도 되나. ‘손절’이라는 좋지 않은 어감의 뉘앙스가 나에게 스멀스멀 영향을 끼쳐오고 있었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관계를 빠르게 정리하기보다 그 관계에서 도망치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을 끝까지 마치고 손을 터는 것을 정리라 한다면, 도망은 그 일을 해보지도 않은 채 눈을 감아버리는 행위이다. 나와 맞지 않는 면이 있다는 이유로 어떠한 시도도 없이 그 관계를 쉽게 눈감아 버리곤 했다. 내 안에 수많은 내가 존재하고, 5년 전의 나와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너무나도 다른 걸 잘 알고 있음에도 상대의 면면을 들여다볼 의지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와 비슷한 상황의 관계를 끝까지 지켜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오랜 공동체 생활 안에서 선을 그었던 사람에게 귀엽고( 사람의 이면을 발견한   종종  애정 없이 이뤄지지 않을 감정을 느끼곤 했다) 다정한 면모를 발견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누구보다 섣부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끝내 이어지지 못했던 한 사람과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작정 손절을 통보했던. 상대가 수긍함으로써 나는 또 눈을 감았다. 조금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그렇게 무책임하진 않았을 거라고 뒤늦게 생각한다. 아무렴 나는 지금까지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선을 그었던 그 미숙함에 후회와 미안함을 갖고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다. ‘때때로 믿음은 우매함과 구분되지 않는다. 혹은 믿음이 분별의 눈을 가려 우매함에 빠지게 한다.’ 여전히 흥미롭게 논의되고 있는 MBTI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을 분류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떤 기준에 규정된 자신의 성격을 굳게 믿고 우매함에 빠지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종 의심의 눈초리로 전체를 직시하는 일 또한 필요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1월, 상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