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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Mar 27. 2022

뭔가 바뀐 거 같지 않아요?

"아, 나 00 씨랑 어제 같이 밥 먹었는데", "왜 증상 있으면서 출근한 거야? 이게 말이 돼", "오늘 약속 있는데 큰일 났네" , "나 저번 주에 부모님 있는 고향 내려갔다 왔는데"


이런 말들을 한 번쯤 들어보았다면? 아마 주변 지인과, 회사 동료의 코로나19 확진 소식을 들었을 때 일 것이다. 실제, 내가 회사에서 들었던 말도 함께 담겨있다.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간 지 2년이 넘은 지금, 나는 얼마 전 코로나19에 확진됐다. 이 글은, 내가 확진되기 전에 있었던 코로나19에 대한 고찰을 담은 글이다.


2021년 8월, 우리 회사 동료가 확진자 친구랑 같이 밥을 먹었다는 소식을 전달한 후 회사는 '전체 패닉'이 되었다. 그 친구는 출근 후, 조용히 재택을 하러 집으로 떠났고 뒤늦게 소식을 안 우리는 PCR 검사를 받고 출근했다. 당시,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 그 친구와 접촉이 많았던 내가 든 감정은 '원망'이었다. 부모님을 만나고 올라왔던 당일이라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던 나는 당시 남자 친구에게 화를 냈다. 


당일, 계획했던 박람회에 가지 못했고 남자 친구와의 저녁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화가 바짝 난 나에게 전 남자 친구는 "누구나 걸릴 수 있는데, 화를 내지 말라. 그 친구가 잘못해서 그런 상황이 생긴 게 아니라,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런 상황을 맞을 수 있다"라고 말하며, 달랬다. 당시, 나는 그의 말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추후 그의 말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환경에게 잘못해서, 변이가 생기고, 그 변이가 다시 우리에게 온 '코로나19' 바이러스. 그것은 박쥐의 잘못도 아니고, 우리의 잘못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누구를 '탓'해서는 안 되는 바이러스라는 것이다. '전염'이 있는 바이러스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기도 하고, 의심하고, 예민하게 만든다. 코로나19가 만든 사회의 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감정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마스크가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지하철 안에서 마스크 없이 기침을 하던 할아버지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던 때. 그때를 기점으로 나는 이 바이러스가 사람을 끝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침을 하는 사람만 봐도, 사방의 사람들이 홍해로 갈라졌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이러스가 퍼지면 퍼질수록 이런 감정은 자연스럽게 수그러든다. "너도 걸리고, 나도 걸릴 수 있는 병", '마스크를 써도, 안 써도 걸리는 병"이 코로나19가 될수록 말이다. 


그러던 와중, 정말 회사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 이건 큰 사건이었다.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와 함께 했던 나날들이 떠오르며, 나의 감염성을 예측했다. 


"아, 거의 80%는 된다"


나는 다시 선별 검사소에 가서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에게 문자를 보낼까 말까 고민했다. 음성이 나오고,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는 음성이래, 걱정하지 말고 몸 관리 잘해"


사실, 그렇다. 주변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그럼에도 그 확진자를 본능적으로 걱정해야 되는 것은 맞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는 "비상사태"가 되었고, 그와 밥 먹는 일명 "밀첩 접촉자"를 찾아냈다. 그리고 밀첩 접촉자와 며칠 동안 꾸준히 밥을 먹었던 나 역시 "위험군"으로 분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 상사의 말이 머리에 팍- 꽂혔다.


"00 씨, 00 씨는 완전 밀접 접촉 아니야? 위험군이네 위험군, 사실상 거의 걸렸다고 봐야지"

"제일 걸릴 확률 높은 00 씨가 노트북 갖다 주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어, 근데 00 씨 며칠 전에 00랑 계속 밥 먹지 않았어?"


등의 말들이 회사 허공에 맴돌았고, 나는 갑자기 상사의 말에 '욱'하고 올라온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두 다 접촉자인데 거기서 다시 그런 "찐 접촉자"를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음성까지 나왔는데 기분이 상했다. 아무튼 이후, 우리 회사의 직원 절반 이상이 연쇄 감염에 걸렸고 일련의 과정들이 큰 꽈배기처럼 '잠복기' 사이에서 촘촘히 엮여 터졌다. 그렇게 사람이 사람을 의심하는 병이 '코로나19'인 것이다.


근데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격리를 끝내고 온 직원들은 하나같이,

"한 번 걸리니까, 이제 무섭지 않다"며,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오히려, 걸리지 않은 사람이 조심해야 하는 이 상황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달까. 마스크 없이, 나와 밥을 먹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퇴근 후, 운동장에 갔는데 자신이 3주 전에 코로나19 확진이 됐었다며 


"에휴, 어차피 걸릴 거 걸리는 게 나아"


라고 말하며 코로나19를 정말 '감기'라고 말하며 걸리지 않으려고 마스크를 끼고 있는 나에게 '걸려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런 바이러스면 왜 마스크를 끼고 난리 친거겠냐"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담>


결국 나도 며칠 뒤 확진이 됐다. 직접 걸려보니, 퀵 약 배달은 좋았지만, 격리는 체계가 없었다. 확진자가 격리 수칙을 어기고, 밖에 돌아다니는 것도 이해가 된다. 감시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율에 맡기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내가 걱정하던 존재'가 된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나랑 밥 먹은 사람들, 나랑 얘기했던 사람들. 전 남자 친구의 말이 맞았다. 


지난해, 회사 건물 내에 한 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내 주변에 확진자는 회사 건물을 공유하는 아무개 씨가 처음이었고, 우리는 같은 층이 아님에도 소독을 하고, 재택근무를 했다. 며칠 뒤, 우리 층에서 확진자가 나왔고 다시 재택을 하고, 소독을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회사에서 청소를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확진이 되었고 우린 '검사'만 하고 다시 출근했다. 회사에 확진자가 나와도 아무런 소독 없이 그들과 함께 회의하고, 밥 먹고, 이렇게 점점 느슨해진다. 마음도, 몸도, 방역도. 어떤 사람은 2년 즈음이나 되었으니, 그럴만하다고 말한다.


그래도 무언가 계속, 쳇바퀴처럼 도는 회사 생활과 삶 속에서 

어떤 구멍에서 작은 물줄기가 자꾸만 새고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것은 지울 수가 없다.

그런데 이걸 어디에, 누구를 탓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그저 안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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