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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블랙 Jun 28. 2021

저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4. 글을 쓰는 이유를 골랐습니다.

이 글들은 내가 글이라는 것을 쓰게 된 계기와 쓰면서 느끼고 알게 된 것들을 쓰는 일종의 '메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내 글에 대한 변명이자 핑계고, 근거이자 증명이고 싶은 글이다.

사족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쓰는 것은, 30대가 되기까지 나를 구성하는 요소를 거의 기록하지 않았었다는 부채 의식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함이라고 너그러이 봐주면 좋을 것 같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너무나 유명한 인용구다. 하지만 난 아직도 그게 어떤 뜻인지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의미로 그 문장이 내려오는지 모르겠다. 내 주관적으로 해석하자면, 사람의 가치는 '이름을 남기는 데' 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고등학생 때 한창 싸이월드가 유행했다. 싸이월드가 미니홈피 외에도 다른 서비스를 연동하여 론칭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페이퍼'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그 서비스는 지금의 브런치와 유사했다. 작가 심사의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구축되어있는 인프라(싸이월드, 카카오)를 통해 유입되는 글쓰기에 최적화된 플랫폼이라는 것이 그렇다. 난 페이퍼에 수학 관련 글을 연재했었다. 기껏해야 사이먼 싱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H. 하디의 <어느 수학자의 변명>, 폴 호프만의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와 경문 수학 산책 시리즈를 읽고 적당히 내가 버무린 것을 대충 읽기 좋게 쓴 것이었다. 페이퍼는 '오늘의 페이퍼'라는 큐레이팅 요소가 있었다. 투멤, 투데이 멤버처럼 하루에 하나씩 싸이월드에서 페이퍼 하나를 추천해주는 것이었다. 본인이 신청해서 추천 풀에 포함될 수 있었다. 글이 조금 쌓이자 난 내 페이퍼를 냉큼 신청했다.


내 페이퍼가 어느 날 오늘의 페이퍼로 선정되었다. 싸이월드 메인에서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날 미니홈피 투데이가 10,000을 넘게 찍었다. 그 이후, 싸이월드에서는 '공식 페이퍼'라는 것을 선정했다. 각 분야별로 페이퍼를 하나씩 '공식 페이퍼'로 선정해, 각종 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그 혜택이래 봐야 한 달에 도토리 몇십 개였다. 가끔의 시사회, 공연 등의 혜택도 있었던 것 같다. 난 공식 페이퍼 수학 분야에 선정되었다. 한 달쯤 후엔가, 경제 분야 공식 페이퍼였던 분이 신문에 나오는 것을 봤다. 당시 모 경제연구소에 계셨던 분이었다. 그 기사에는, 싸이월드에서 경제 분야 공식 페이퍼로 활동 중이라는 내용이 마치 대단한 이력처럼 적혀 있었다.


나는 한낱 고등학생이었다. 단지 신분만이 아니라, 그 지식 또한 일천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 학문 분야'에서 내 페이퍼 따위를 공식 페이퍼로 선정한 걸 보면, 공신력 따위가 있었을 리가 없다. 다행히 당시의 나도 나이에 비해 조금은 지혜로웠던 터라, 공식 페이퍼를 공짜 도토리와 비슷한 개념으로만 인식했었다. 하지만 신문에서 상기한 기사를 보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게? 이거가? 신문에? 왜? 뭐 대단한 거라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또 그럴듯해 보였다. 당시 싸이월드는 전 국민 누구나 아는 서비스였고, 거기에 '공식'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이거,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상당히 그럴 듯 해 보일 것 같았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밖으로 보이는 이력의 무게는, 그 이력을 얻기 위한 노력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운 좋게 누가 그 이력을 알아봐 줄 때, 기분이 상당히 좋다는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그게 중요했다. 있어보이는 이력, 생각보다 상당히 자존감이 생긴다. 그 이후 난 여유가 있을 때마다 되도 않게 내 이름을 남기려고 헛짓거리를 했었다.


가장 최근에 얻은 내 이력은 '브런치 작가'다. 온갖 온라인 강의 사이트와 유튜브 등에 '브런치 작가 되기' 강의가 올라오고, 브런치 작가 심사 불합격 후기가 웹상에 그득하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소재 선택과 계획만 잘 잡는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도 글 수정 없이, 향후 계획 수정만으로 재수 통과를 했으니까. 이 또한 밖으로 보이는 이력의 무게가 그 이력을 얻기 위한 노력과 정비례하지 않는, 좋은 예시겠지.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한 이유를, 유려한 UI라고 쓴 적이 있다.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 그냥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었다. '브런치 작가'가 이미 이력이 되는 세상이니까. 은전 한 닢처럼 그저 그 이력 하나 달고 싶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무심한 척 시크하게, 속으로는 간절히 심사 통과를 기원했었다. 있어보이고 싶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알았다. 아니, 인정하기로 했다. 그냥 있어보이는 이력을 갖고 싶어서 쓰는 거다. 심지어 난 다른 이력을 더 갖고 싶다. '출간작가'와 '등단작가'라는 이력이다. 물론 두 이력 모두 단순히 갖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브런치에 쓴 글 적당히 묶어서 부크크에 POD로 출판하면 난 큰 비용 없이 '출간작가'가 된다. 소위 '등단 장사'를 하는 F급 문예지를 골라서 몇 번 시도하면 '등단작가'가 될거다. 다만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분명 있어보이는 이력을 갖고 싶은 것은 맞다. 하지만 실제로 '있고' 싶다. 요즈음 독립서점을 다니며 독립출판한 에세이들을 꽤 읽었다. 알량한 내 눈으로 보기에도 일기에 지나지 않은 글들이 많았다. 나는 그러면 안된다. 실제로 내실있는 책을 출간하고 싶다. 등단도 마찬가지다. 돈을 내면서 등단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그 돈으로 아이패드 프로 5 12.9 셀룰러 2TB를 사고싶다.


위 내용이 내가 요즘 글이 뜸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문예지에 대한 평과 그 곳에 실린 수필들을 보면서, 공모할 곳을 고르고 있다. 수필 이론서들을 보면서 부족했던, 아니 아예 없었던 글쓰기 기초를 채우고 있다. 내가 예전에 쓴 글을 보면서 공모할 수 있게, 또 출간할 수 있게끔 글을 끝없이 다듬고 있다. 글은 새로 쓰는 것보다 다듬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앞으로도 글이 뜸할 것 같다. 이따금 글을 쓰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을 때 글을 쓸 수도 있겠지. 아니면 기존의 글을 모두 완벽하게(!) 다듬어서 새로 글을 쓰는 상황일 수도 있고.


이렇게 내 노골적인 욕망 고백을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풍파를 버텼다기보다는 그저 온 몸으로 맞아버린 청춘이나, 나름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건실하게 살아가는 청년의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그래도 좀 봐줘라. 스스로한테도 있어보이려고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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