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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블랙 Nov 27. 2022

일말의 기대

진이 오빠. 어머니가 옆집 할머니와 이야기할 때 들었던 이름이라고 했다. 우리 손녀딸 진이 오빠한테 말해서 연예인 시킬 거라고. 손녀딸이 연예인 할 재목인지 되묻기보다, 진이 오빠가 누군지를 물어봐주길 바라는 뉘앙스가 강했다고 한다. 난 억양 없이 전해 들은 말인데도 불구하고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생각한 건 BTS의 진이었다. 여러 모로 오빠라고 불릴 만했다. 아마 나도 형아라고 부르며 안길 테니까. 아닌가? 그럼 <남자셋 여자셋>의 김진인가? BTS의 진보다 나이가 있긴 하지만 오빠라고 불리는 건 좀 이상했다. 도무지 내 선에서는 진이 오빠를 유추할 수 없었다.


남진이었다. 아 그렇구나. 근데 어떻게 옆집 할머니가 그 전설 남진을 아는 거지? 당연하게도 어머니는 그 이유를 물었고, 그 옆집 할머니는 예전에 같이 놀러 가기도 했다고 한다. 세상에, 그렇구나. 그 예전이 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놀러 가기도 했을지, 놀러 간 적이 한 번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사실 나도 가끔 비슷한 이야기를 아이스브레이킹에 써먹곤 한다.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하하가 군대 갈 때(사회에서 먹는 마지막 햄버거...), 당시의 게릴라 콘서트 현장에서 의자 설치를 했었다. 무대 설치가 그렇듯이, 막상 무대가 진행되고 있을 때는 할 일이 없다. 스태프 목걸이를 걸고 은근히 좋은 자리에서 무대를 즐기면 그만이다. 그때도 그랬다. 무대가 잘 보이는 흡연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 당시 정준하 매니저로 유명하던 최 코디(최종훈)가 담배를 피우러 왔다.


무대 설치 일을 하면서 연예인은 질리도록 봤었지만, 무한도전은 지금도 그때도 유난히 좋아했기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또 흡연자들끼리는 바닥에 깔고 가는 친근함이 있었기에 은근히 다가가서 바글바글하네요-라고 나직하게 한 마디 던졌다. 근데 너무 은근하고 나직했던 건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나도 뭔가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라서, <헤어질 결심>에서 라이터를 권하다가 거절당하고도 꿋꿋했던 형사처럼 담배를 마저 피고 천천히 떠났었다.


날이 지나고 다른 무대 일을 하다 보니, 그 일은 그렇게 또 잊혔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온갖 너스레를 떨고 변죽을 치며 분위기를 띄워야 할 상황이 올 때, 그때 일은 '예전에 최 코디랑 같이 담배 피우면서 하하 군대 보냈다.'라는 자극적인 토픽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아마 그때 최 코디가 '그러게요'라고 한 마디라도 대꾸를 했더라면, '예전에 최 코디랑 같이 담배 한 대 물고 얘기하면서 하하 군대 보냈다'라는 토픽이 될 수도 있었겠다.


비슷한 케이스로, 프리 선언했던 김성주 아나운서가 처음으로 MBC에 복귀하는 행사에서도 무대 설치 일을 했었다. 그 일은 '김성주 MBC 복귀할 때 내가 깔아줬다'라는 토픽이 되곤 한다.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고, 실상을 이야기하면서 분위기가 풀리기도 하는 유효한 대화 소재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 옆집 할머니랑은 조금 다른 게, 그땐 그랬지-에서 멈출 뿐 더 나아가진 않는다. '언제 성주 형 만나서 방송국 좀 꽂아달라고 해야 하는데'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옆집 할머니는 뭔가 일말의 기대가 진짜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몇십 년이 지났을 수도 있지만, 지나가는 말이라도 진짜 그런 이야기가 오갔을 수도 있으니까. 그 찰나의 기억이 일말의 기대가 되어 마음속 어딘가에서 작은 동력원으로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다. 보통 친구들과 만나서 놀게 되면 카페를 가거나 평범한 놀이를 하게 되는데 이 친구는 달랐다. 뭔가 색다른 것을 하며 같이 시간을 보냈었다.

고등학생 때는 같이 IT 스타트업 대표들과 블로그 홍보 미팅을 나갔었다. 대학생 때는 월드컵 때 막대풍선을 팔았다. 트위터 팔로워 수 할인이라는 것이 있을 때는 2만 명 남짓의 계정을 들고 가서 공짜로 먹고 오기도 했다. 내가 취업하고 나서는 주말에 푸드트럭을 도와주러 가거나, 암호화폐 지수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같이 시간을 오래 보내기는 어렵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각자의 일이 바빴다. 하지만 언제고 일 하나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같이 일을 하기는 어려워지겠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 같이 즐겁게 했던 일에 대한 경험이 있으니까. 같이 하면 재밌을 것 같았으니까. 합이 잘 맞을 거니까.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번 달 초에 그 친구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몇 년을 아프다가 뇌종양으로 가버렸다. 이미 알고 있었다. 친구의 누나 분과도 전에 전화를 몇 번 했었다. 병원에서도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집에서 남은 시간을 가족과 보내라고 했었으니,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아침에 연락을 받았을 때 슬프지도 않았다. 그렇게 됐구나. 그렇구나. 빈소에 찾아가니 막상, 차마 그 친구의 사진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두 번 반의 절을 끝까지 안 하고 여섯 시간을 버티다가 가기 직전에야 겨우 하고 뛰쳐나왔다.


보름 정도가 지나고, 마음을 거의 추스르니 더 슬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고 나서야 뭔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난 멍청하게도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도 낫지 않을까? 나아서 회복하고 나면 같이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 거다. 병원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래도 그 친구가 아직 살아있었으니까. 나도 아직 살아있으니까. 우리가 같이 일하면 정말 재밌을 텐데, 언젠가는 같이 뭔가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았으니까. 그 일말의 기대를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그 친구가 먼저 세상을 뜨고 나니, 그 일말의 기대가 사라진 거다. 실질적으로 가능성이 거의 없던 건데도, 난 그 기대에 약간은 기대고 있었나 보다. 생길 수 있었던 미래의 경우의 수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가능성이니, 확률이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옆집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부디 남진 님께서 오래오래 사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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