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블블랙 Jul 03. 2023

짐짓 모른 척

일을 쉬는 동안 운전을 참 많이 했다. 맛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네비를 찍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두 군데만큼은 가기가 영 편하지만은 않다.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차장이다. 경차임에도 불구하고 주차는 아직도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남들은 이만한 차를 끌고도 한번에 쑥 잘 집어넣던데, 난 그게 참 잘 안된다. 어째 잘 넣었다 하면 내가 도저히 내릴수가 없고, 내 자리를 만들었다 싶으면 행여나 오른쪽 차에 닿을까 쩔쩔 매게 된다. 평행주차는 말할 것도 없다. 분명히 위치를 수정하고 있는데 더 엉망이 된다. 이거 참 어렵다. 그래도 누가 차 바꿀 생각 없냐고 물어볼 때 돈이 아니라 주차 핑계를 댈 수 있는 건 다행이긴 하다. 그리고 이 차 너무 예쁘고 귀엽단 말야.


나머지 하나는 세차장이다. 세차장은 어렵진 않지만 조금 곤혹스럽다. 자동 세차를 하러 들어갈 때는 사이드 미러를 접어야 한다. 하지만 내 차는 사이드 미러가 자동으로 접히지 않는다. 손으로 접어야 한다. 앞의 차가 부드럽게 사이드 미러를 접을 때 난 손으로 꾸역꾸역 접어야 한다. 다행인 건 차가 작아서 조수석의 사이드 미러도 내 자리에서 팔만 뻗으면 접을 수 있다는 거다. 손세차장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독일 그 자체였다. 내 귀여운 차를 끌고 들어간 순간 난 이방인이 되었다. 세상 모든 외제차 브랜드는 거기 있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괜히 야코가 죽어 도망치듯 나오게 되었다.


새로 구한 회사는 새로 구한 오피스텔 근처라, 당분간은 차 탈 일이 별로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도 날 불편하게 만드는 차장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나였다.


업계 특성상 직급이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무조건 님이었다. 그런데 지금 회사는 직급이 존재했다. 처우 조건이 적혀 있는 메일에 내 직급은 차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기분이 너무 묘했다. 대리는 짬 좀 먹은 사회인. 과장은 원숙한 어른. 차장은 진짜 그냥 찐 아저씨. 이게 내가 생각하는 직급의 이미지였다. 근데 내가 차장이라니.


내가 무심했던 탓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10년 넘게 내 호칭은 그대로 '님'이었다. 내 친구들도 예나 지금이나 거의 미혼으로 남았다. 공부에 열심히던 애들은 그 때 그 연구소와 연구실에 남아있다. 나도 내 주변도 변한 게 없었다. 근데 내가 차장이라니.


생각해 보면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도 조금씩 바뀌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일만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관리, 교육, 채용 등.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지 못했던 것들을 요구했었다. 어떻게든 해냈던 것도 있지만 만족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중요한 건 확실히 사회는 나에게 요구했었다.


사실 그간 직급은 없었어도 직책은 있었다. 일찍 결혼한 친구는 아이가 곧 초등학교에 간다. 공부를 이어가던 친구들은 이미 모두 박사가 되었다. 무심했다기보다는 짐짓 모른 체 했던 건가 보다.


모른 척해도 어쩔 수 없다. 회사는 나를 차장으로 대우한 만큼, 나는 회사에 최소한 차장급의 밥값을 해야 한다. 어디에라도 차는 대야 하고, 차는 닦아야 하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10대들이 볼 수 없는 10대들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