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뷰어X Aug 22. 2019

화려한 포장지, 속 빈 강정, 뮤지컬 <엑스칼리버>

by ReviwerX앤

화려한 포장지, 속 빈 강정 <엑스칼리버>


<엑스칼리버>는 올해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기획사 EMK의 신작이다. 마타하리, 웃는 남자에 이은 3번째 대형 창작 뮤지컬인 이번 작품은 스위스에서 공연된 작품이지만 EMK에서 판권을 사와 대폭적인 수정을 거쳤기에 사실상 EMK의 창작뮤지컬이라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27인조 오케스트라에 65인의 앙상블, 100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그야말로 역대급 공연을 보여주겠다던 EMK의 야심 찬 다짐과 다르게 막상 뚜껑이 열린 <엑스칼리버>는 화려한 볼거리에 비해 빈약한 내면을 보이며 기대에 미치지 못한 모습들을 보였다.


방향을 잃은 인물들

엑스칼리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물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극의 중심에 서 있는 아더와 기네비어가 특히 그러하다. 


<엑스칼리버>에서 그리는 아더는 나약한 한 사람과 위대한 왕 사이를 어지럽게 오간다. 1막의 시작 장면과 2막은 엔딩 장면은 아더가 바위산에서 엑스칼리버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수미쌍관의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연출은 1막의 아더와 2막의 아더가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내면이라는 것은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극 전반에 걸쳐 아더가 어떤 이야기를 통해 좌절하고 성장하였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막의 엑스칼리버를 뽑은 아더와 2막 엑스칼리버를 치켜드는 아더의 성장은 무엇인지 관객은 쉽게 생각해낼 수 없다. 그것은 이 극이 아더의 성장 방향을 뚜렷하게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왕으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못하고, 운명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다 끝끝내 운명을 극복해낸 모습도 보이지 못한다. 그저 주변 사람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즉흥적이며 감정적인 모습만 보여준다. 관객이 표면적으로 느끼는 변화는 1막에서는 화나게 한 친구에게 주먹을 들었지만 2막에서는 바람이 난 아내와 친구를 용서할 만큼 분노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이다. ‘내 안의 용’이라는 표현으로 애써 포장하려 했지만 아더가 맞서야 하는 운명이 고작 분노조절장애였다는 것인가. 이러한 아더의 모습에서 색슨족에 침입에 맞서 원탁의 기사와 함께 브린튼을 수호하는 용맹한 왕의 모습을 생각해내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또한 기네비어도 극 전체에 걸쳐 일관된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다. <엑스칼리버>는 기네비어를 여전사로 상징함으로써 자율적인 캐릭터를 부과하였다. 극 초반에 기네비어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전사가 되어 전쟁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기도 하고 두려움에 도망치려는 아더를 독려하는 등 진취적이고 용기 있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저돌적인 여전사인 기네비어는 사라지고 결국은 변한 남편 옆에서 눈물짓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전쟁을 대비해 맹훈련을 하던 여전사는 사라지고 남편의 무사를 기원하며 기도하는 지고지순한 아내가 된다. 남편이 괜한 화풀이를 해도 아무런 대항하지 못하는 순종적이고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변한 기네비어는 불륜을 저지르고 난 뒤 결국 수녀라는 길을 택한다. 용감한 여전사가 수녀가 되는 결말에서 자율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의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차라리 기네비어가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아더의 뺨을 한 대 날리고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랜슬롯과 작정하고 바람이라도 피웠으면 진취적이고 자율적인 기네비어의 정체성이 더 잘 보이지 않았을까.



웅장한 무대, 미미한 사람들

<엑스칼리버>는 그동안 EMK가 보여왔던 것과는 조금 다른 무대를 선보이고자 하였다. 이전 EMK 작품의 무대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화려함이었다. 강렬한 색채와 번쩍이는 세트를 이용해 마타하리의 대기실과 무대, 웃는 남자의 궁정같이 휘황찬란한 무대를 나타내었고, 이렇게 화려한 무대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러나 <엑스칼리버>에서는 화려함이 아닌 웅장함과 거대함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객석 3층에 보아도 그 높이가 놀라운 2.5m의 바위산은 세종문화회관의 큰 무대를 꽉 채우며 관객들에게 엑스칼리버의 위대함을 시각적으로 표현해주었다. 또한 색슨족과의 전투 장면에서 12m 높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200 톤의 물로 비를 표현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관중을 압도하는 놀라운 스케일의 무대를 선보였다.


또한 웅장함을 보여주기 위해 <엑스칼리버>에서 새롭게 등장시킨 것이 바로 학생 앙상블이다. 학생 앙상블은 말 그대로 학생들로 이루어진 앙상블이다. 서울예술대학과 산학협력을 통해 선발된 30여 명 학생 앙상블들은 시각적으로 많은 인원이 필요한 장면에 무대를 채우기 위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아주 적은 장면이며 또한 무대에서 말 그대로 머릿수를 채우는 그 역할만 한다. 기존 앙상블에 학생 앙상블까지 더하면 70명에 달하는 대인원이 되기 때문에 이 학생 앙상블들이 무대 위에서 어떠한 동선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멈추어져 무대 위에 서 있다. 군중들이 나오는 장면이라고 진짜 사람들을 떼로 올려다 놓는 것이 무대예술에 적합한 연출 방법은 아닐 것이다. 단 몇 장면에 그저 서 있기 위해서 학생 앙상블들은 공연장에 나와 분장하고 대기한다. 과연 이 학생 앙상블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30여 명의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등장인가. 배우는 세트가 아니다. 앙상블은 무대의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연출의 무능을 몸으로 채우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 또한 연기자이며 무대 위에서 예술을 하는 예술인들이다. 무대 위의 공간을 채우는 역할로만 사용할 것이라면 인물 모양의 패널을 세우는 것과 다름이 없다. 웅장한 무대를 표현한다는 일념에 그보다 수천 배는 더 웅장한 사람을 한낱 미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과연 <엑스칼리버>만의 문제인가

EMK의 창작시리즈인 <마타하리>, <웃는 남자>, <엑스칼리버>는 공통점이 많다. 이 세 극의 가장 큰 공통점 주인공이 실존했거나 원작이 있는 ‘원래’ 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주인공 개개인은 강한 개성과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EMK 뮤지컬 속에서는 주인공의 개성이 홀연히 사라진다.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사고하고 행동하던 주인공들은 어느 순간 사랑, 출생의 비밀과 같은 전형적인 시련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이 이후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저 그런 출생의 비밀과 사랑 이야기의 코드 반복으로 줄거리가 전개된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이중 첩자도, 부자들은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이라 외치는 광대도, 브리튼을 수호한 용맹한 전설 속의 왕 아더도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보편적인 문제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평범한 한 사람만 남는다. 극이 시작할 때 보여주었던 주인공들의 특별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뻔한 이야기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물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은 이야기의 빈약함과 이어진다. 원작, 실제 사건이 있었기에 제작자는 깊은 고민 없이 손쉽게 ‘원래’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개연성이 조금 떨어지거나 무리수처럼 보여도 ‘원래’가 그렇다는 빠져나가기 좋은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존재하는 인물을 타이틀 롤로 삼았으면 그 인물에 대한 더 심층적인 분석이나 깊이 있는 해석이 있어야 한다. 왜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으며 이미 너무나 유명한 사람과 이야기이지만 우리 작품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였다는 제작자의 생각이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EMK의 작품에서 과연 그러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이러한 스토리의 빈약함을 채우는 것은 볼거리이다. 세 작품 다 100억이 넘는 제작비를 투자하여 눈이 즐거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의상과 무대에는 많은 돈을 투자하여 관객으로 시선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거기다 한국의 뮤지컬 관객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와일드혼의 노래로 듣는 귀도 즐겁게 해준다. 그러나 정작 그 화려한 그릇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깊이는 무엇인가. 이 세 작품이 과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고 있는가에 대한 제작자의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EMK는 대극장 창작극을 만들어내는 한국에서 몇 안 되는 대형 뮤지컬 회사이다. ‘유명배우+와일드혼+화려한 볼거리’라는 공식의 답습은 언젠가 한계가 찾아올 것이다. 순간의 표팔이에 연연하지 말고 보다 더 먼 미래를 보자. 좋은 라이센스 뮤지컬을 들여와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제작사인 만큼 한국 뮤지컬의 창작시장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EMK가 새로운 공식으로 흥행에 성공하면 그것은 한국 창작 뮤지컬 시장에 또 하나의 기준이 될 것이다. 부디 한국 창작 뮤지컬 시장에 좋은 기준을 세우는 제작사로써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떠밀리는 안나, 선택하는 테레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