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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어X Aug 22. 2019

떠밀리는 안나, 선택하는 테레즈

by ReviwerX카일

떠밀리는 안나, 선택하는 테레즈, 뮤지컬 <안나 카레리나> & 뮤지컬 <테레즈 라캥> 


21세기에 부활한 19세기 여성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와 <테레즈 라캥>은 둘 다 소설을 원작으로 가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 다 19세기에 쓰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썼고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가 '테레즈 라캥'을 썼다. 소설을 뮤지컬로 옮기는 일은 드문 일은 아니다. 이미 검증된 익숙한 등장인물은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쉽다. 현대와는 다른 의상과 생활 양식 등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가 된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공연된 두 작품은 소설의 인지도를 쉽게 가져가면서 소설 속 여성을 21세기에 새롭게 선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안나 카레니나>는 대극장 뮤지컬로 웅장한 규모에 화려한 볼거리를 자랑한다면 <테레즈 라캥>은 소극장 4인극으로 밀도 있는 작품을 선보인다. 대극장 작품은 다양한 관객의 다양한 취향을 충족시킬 만한 다양한 매력을 구비해야 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 설원의 스케이트 장면이라던가 들판의 추수 장면 등을 통해 많은 앙상블의 군무와 합창을 선보인다. 무대 전체를 뒤덮는 기차역과 기차 영상이라던가 파티장과 오페라 극장, 들판 등으로 전환되는 무대는 시각적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테레즈 라캥> 같은 소극장 뮤지컬은 상대적으로 소수의 관객을 위한 매니악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테레즈 라캥>은 뮤지컬에서 흔치 않게 스릴러에 가까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관객에게 긴장감을 선사한다.


두 작품 다 흔치 않게 여성의 욕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쟁취하는 모습은 사뭇 달라 보인다. 작품의 완성도나 관객의 취향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두 작품 속의 여성 인물들이 오늘날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기찻길에 '떠밀린' 안나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 역장의 제복을 입은 MC의 철길은 위험하니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노래로 극이 시작된다. 이어진 파티장에서 안나가 브론스키가 춤을 추고 사랑에 빠지는 동안, 주변 인물들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수군거린다. 둘이 만나기 전에 안나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안나의 선택에 대한 이유나 배경은 없고 주변인에 의해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힌 채 이야기가 전개된다.


안나의 전남편 카레닌은 남들의 손가락질에도 여전히 안나를 측은히 바라보고 안나를 안아준다. 또한 레빈과 키티같은 캐릭터는 1막 초반에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 양념처럼 등장했다가 2막 후반에 다시 등장해서 전원에서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여준다. 모두 안나의 선택과 불행을 부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인 셈이다. 모든 캐릭터가 한목소리로 안나가 틀렸다고 가리키고 있다. 직선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기차와 MC라는 상징 또한 안나가 파멸할 거라고 암시하고 있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MC라는 캐릭터는 이 작품을 쇼로 만든다. 안나의 이야기에서 거리 두기를 함으로써 안나에 감정 이입하기보다는 반면교사로 삼도록 하고 있다.


극 중에서 안나는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안나는 내내 19세기의 도덕률 안에 갇힌 죄수일 뿐이다. 브론스키를 선택하고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하기엔, 세상이 그녀를 떠민 것처럼 보인다.



파멸을 '선택한' 테레즈

한편, 뮤지컬 <테레즈 라캥>은 라캥부인의 작은 집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다. 세트의 변화나 장소의 이동이 거의 없고 한 가족과 그 친구가 등장인물의 전부이다. 동일한 공간 안에서 사촌지간인 테레즈와 카미유, 어머니 라캥 부인과 친구 로랑의 제각각의 욕망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발달한다. 소극장의 공간적 한계이기도 했겠으나, 좁은 공간은 극의 밀도를 높이기에 용이하다. 밀실 공포증을 유발할 것 같은 숨 막히는 공간에서 욕망이 주체 못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집에 모여 웃는 네 사람은 서로 다른 욕망을 품고 있다. 테레즈가 욕망하는 것은 자유이다. 카미유는 테레즈에 대한 집착, 라캥 부인은 카미유의 보호자, 그리고 로랑은 집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테레즈는 어린 시절부터 억압과 통제 속에서 자랐으므로 다른 세 사람보다 테레즈의 욕망은 설득력이 높다. 테레즈는 조심스럽고도 도발적인 태도로 욕망을 표출한다. 여성의 욕망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많지 않아서 이 극은 꽤 흥미진진하다. 음향이나 조명도 테레즈의 심리를 따라간다. 카미유의 집착이나 라캥부인의 통제는 테레즈가 원하는 것, 테레즈가 두려워하는 것을 부각할 수 있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테레즈의 자유에 대한 욕망은 주로 사랑이나 성욕 등으로 표현되기는 하나 결국 주체적인 삶으로 귀결된다. 다른 세 사람의 욕망에 비해 테레즈의 그것은, 누구의 것을 뺏거나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이들의 욕망이 테레즈의 욕망을 억누르기 때문에 테레즈는 자기 것을 얻기 위해 로랑과 손잡고 카미유를 죽인다. 그게 죽음이긴 했어도 테레즈는 자기 삶에서 '선택'이라는 것을 한다. 등장인물이 다 죽어버리는 뮤지컬이라니, 누구의 편도 아닌 공정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 관객을 위한 새 뮤지컬

원작이 있는 소설을 뮤지컬이라는 다른 장르로 옮겨왔다면 이 장르 하나로 원작을 모르는 관객까지 이해시켜야 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안나 카레니나>도 <테레즈 라캥>도 독립적인 작품이라기보다는 원작의 명성에 기댄 안일한 복제라는 생각이 크다. 특히 <안나 카레니나>는 이 작품이 관객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화려한 외양을 한 꺼풀 벗겨보면, 과거의 기준과 가치관을 그대로 들고 와서 새 옷을 입은 척 해 봐도 안나는 극의 주동 인물로써 활약했다고 하기 어렵다. 기존의 질서 안에서 발버둥 치다 소멸한 캐릭터일 뿐이다.

 

그나마 <테레즈 라캥>은 인물의 관계와 동기가 한눈에 보인다. 무대의 조악함이나 연출의 미숙함이 아쉽긴 하지만, 적어도 <테레즈 라캥>은 테레즈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물이 선명하고 흥미롭다. 안나보다 테레즈는 욕구의 실현을 위해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넘겨졌다.


뮤지컬의 창작자는 시대의 재현과 원작의 재해석 중에서 선택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19세기의 남성 작가들이 여성 주인공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는데, 그 잣대로는 21세기의 가치관을 재어볼 수 없다. 언제까지나 남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여성, 구습과 도덕 안에 갇힌 여성 캐릭터를 무대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대한 원작의 명성과 영화에 의지해서 뮤지컬을 소비시키려는 욕심보다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캐릭터에 대한 열망이 더 컸더라면 좋았을 텐데. 과거의 향수에 젖기에는 오늘 공연을 보는 관객에게 추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과거가 딱히 없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도 바뀌는 시대가 되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왔던 수백 년 전 설화도 21세기에는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아버지 아니면 남편에게 순종해야 했던 쟈스민은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는 캐릭터로서 자기 목소리를 낸다. 제목이 여전히 알라딘이었음에도 쟈스민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뮤지컬 창작자들이 명작을 만들 능력이 안 된다면 오늘 공연에 지갑을 여는 관객이 누군지 알아보는 혜안이라도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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