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eviwerX히카루
글자 하나하나에 안타까움을 담아 이 글을 써요. 뮤지컬 <시라노>
2017년 뮤지컬 배우로 20년을 활동해온 류정한이 처음 프로듀서로 도전했던 <시라노>가 돌아왔다. 첫술에 배부르기는 어려운 법. <시라노> 초연은 서사와 캐릭터 등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2019년 <시라노>는 많은 변화를 예고했고, 2년이라는 재정비 시간도 있었으며 김동연 연출가와 새로운 배우들도 합류했기에 ‘초연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기대감이 있었다. 재연은 초연과 다르긴 달랐는데, 그냥 달라졌을 뿐 오히려 퇴보한 모습이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감성과 낭만은 어디에
<시라노>란 작품을 떠올렸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시라노>만이 가진 감성과 낭만이다. 시라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사이고 시였다. 그것이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큰 힘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라노>에서는 그 힘을 느낄 수가 없었다.
시라노가 록산에게 쓴 편지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들로 채워졌다. ‘나의 편지는 입술이오. 이 단어들은 똑똑 떨어지는 꿀이니 그대가 호로로록 마셔 주시오’ 시라노가 록산에게 크리스티앙인 것처럼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록산이 ‘호로로록’을 반복하며 웃음 포인트로 살리고자 하지만 살아나지 않는다. 저 편지로 크리스티앙의 진실한 영혼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는 록산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라노뿐만 아니라 극 중 인물들 대다수의 대사가 작품의 감성을 살리지 못한다. 현재 한국에서 어디를 가도 들을 수 있을 법한 현대적인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흐름을 깨뜨린다. ‘이 새끼. 저 새끼’ 등 비속어와 ‘대박’, ‘관종’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다. ‘밤(夜)에 시인들아 시를 쓰자’의 줄임말인 ‘야시시’ 축제를 열자는데, 과연 그 당시 시라노와 그 친구들이 그런 이름의 축제를 열었을지 의문이 든다. 축제와 전장에서는 빵 이름으로 삼행시를 짓기도 한다. 삼행시란 짧고 임팩트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웃음도 없고 감동도 없는 삼행시들이 반복될 뿐이다.
무대장치와 소품, 영상 또한 작품의 결을 해치는데 한몫한다. 초연과는 달리, 이번 공연에서는 경사진 원형 회전무대를 도입해 극에 웅장함을 더하고자 했다. 회전무대는 효과음이 가득한 전쟁 장면에서는 제 역할을 해내지만, 시라노-록산-크리스티앙의 삼중창에서는 소음을 더하는 천덕꾸러기일 뿐이다. 일명 ‘삐리빠라뽀’라 불리는 ‘달에서 떨어진 나’ 넘버에서 시라노와 가스콘 대원들이 쓰는 빵 모양의 가면은 굳이 써야만 했나 싶다. ‘달에서 떨어진 나’는 록산과 크리스티앙이 무사히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드기슈의 발을 묶기 위해 시라노가 부른 넘버다. 시라노의 슬픔과 아픔이 담긴 동시에 극을 환기하는 쇼스토퍼 역할을 하는 노래인데, 기괴한 가면은 시라노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방해물이 된다. 1막의 대미를 장식하는 ‘나 홀로’ 장면에서 회전하며 커지는 달 영상은 시라노가 떨어진 ‘달나라’보다는 ‘정월대보름’을 떠올리게 한다.
<시라노> 전체를 관통하는 감성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극대화해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담아낸 흔적을 관객들이 찾아보기 다소 어렵다. 고전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왜 사랑을 받았는지, 그 작품만이 지니고 있는 매력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무대예술로 표현하고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크리에이티브 팀은 다시 한번 깊게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캐릭터 붕괴의 연속
작품의 결이 살아나지 못하니, 작품 속 캐릭터 역시 계속해서 무너진다. 극의 타이틀 롤인 시라노부터 살펴보자. 시라노는 싸움과 도전을 좋아하는 검객이자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시인이다. 하지만 극이 시작한 후 계속해서 콧대 높은 시라노의 마초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바쁘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상대가 귀족일지라도 기죽지 않으며, 1 대 100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가스콘 부대 대장의 모습만이 이어진다.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시와 편지의 내용은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다. 이 부분은 초연부터 꾸준히 지적된 부분인데, 보완하지 않았다는 점이 매우 아쉬웠다.
극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록산도 아쉬움이 남는다. 초연 당시 그 시대상에 갇혀있는 록산의 모습에 답답함을 표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현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이 반영되길 바랐던 것이다. 이 부분을 크리에이티브 팀도 인지한 듯 대사를 변경하거나 검술을 펼치는 모습, 크리스티앙을 만나기 위해 전장으로 직접 식량 수레를 끌고 가는 행동 등 소소한 변화를 주었다. 하지만, 1막에서 드기슈를 향해 당당히 검을 들던 록산은 2막 전쟁 장면에서는 숨기 바쁘다. 물론 1대1 검술과 전쟁은 상황이 다르니 여기까지는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길 수 있다. 1막 초반, 오랜만에 시라노와 재회한 록산이 “검술도 배우고 있고, 작문도 공부하고 있으며 여성 문학지를 만들어볼 생각”이라며 시라노처럼 살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하지만, 2막의 록산은 크리스티앙이 죽자 수녀원에서 수를 놓으며, 일주일에 한 번 시라노가 전해주는 세상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세월을 흘려보낸다. 겉보기에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보이는 듯하지만 그 포장지를 걷어내면, 여전히 한계 속에 갇힌 록산이라니. 오히려 답답한 시대적 한계를 지니긴 했지만, 캐릭터 특성을 유지했던 초연보다 못한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크리스티앙 또한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잃어버렸다. 그는 가스콘 신입 대원으로 용맹하고 아름다운 외모도 가졌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진심을 제대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그래도 시라노가 써주는 편지와 대사를 그럴듯하게 따라 하며 록산의 사랑을 얻는 캐릭터였는데, 재연의 크리스티앙은 시라노가 읊어주는 말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고전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지금까지 사랑받아온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인물들의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진실한 영혼을 알아보고 싶다고 외치지만 진실한 사랑을 앞에 두고도 못 알아본 록산, 남들과는 다른 코 때문에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지 못한 시라노, 사랑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말을 제대로 못 하지만 그 마음만은 진실했던 크리스티앙. 세 인물의 이야기와 그들이 주고받는 감정들은 보편적인 감정이고, 현재 우리들에게도 울림을 줄 수 있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 울림이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해졌을 때 2019년 현재 <시라노>가 공연되는 이유가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그 이유를 제대로 성립시켰는지 의문이 든다.
여전히 찾아보기 힘든, 아니 이제는 사라져버린 것 같은 작품의 감성과 낭만 탓일까. <시라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퇴색되어버린 것만 같다. 그가 건네는 위로, 용기, 사랑, 우정이 무엇이었는지 작품을 본 후에 남은 것이 없었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아니 누구의 잘못임을 따지는 시간도 아깝다. 진심을 담아 이 글을 전하니, 이 진심이 닿아 <시라노>가 하루빨리 감성과 낭만을 되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