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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어X Mar 15. 2018

날아오르기엔 턱없이 부족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by reviewerX 카일

얼마 전에 <댄서>라는 제목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런던 로열 발레단 최연소 수석 발레리노인 세르게이 폴루닌의 다큐 영화였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난한 소년은 가족의 후원과 지지로 영국으로 발레 유학을 떠나 어린 나이에 엄청난 성공을 이뤄낸다. 그러나 소년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희생하느라 서로에게 소원해지고 이혼을 한다. 세르게이는 로열 발레단의 규정을 어기고 일탈을 거듭하다 발레단에서 나온다. 주인공은 아직 20대이고 여전히 갈등도 성공도 현재진행형인 그 영화를 보자니 저절로 <빌리 엘리어트> 생각이 났다. 척박한 환경, 재능있는 아이, 주변의 몰이해 또는 가족의 희생, 성공으로 이어지는 '개천에서 용 나는' 스토리는 드물지 않지만 이런 어린아이의 성장 드라마는 큰 박수를 받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넘버와 안무, 감동적인 이야기로 꾸며진 완벽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재연, 7년을 기다렸고 마침내 빌리가 왔다. 그런데 기다림이 너무 길었는지, 설렜던 시간의 기대보다 작품은 다소 허전하고 허무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넘버, 무대 연출, 안무 모두 정말 좋았다. 그런데도 허전하다니. 내가 감히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 빌리를 보고? 불온한 사상을 품은 것처럼 스스로 검열을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내 감상과 느낌에 충실하기로, 허전하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의 이유를 찾아보기로 한다. 



연기로 채워지지 않는 텅빈 무대

<빌리 엘리어트>의 무대는 단순하게 운용된다. 주요 무대 세트는 빌리의 방이 있는 이층짜리 철골 구조물이다. 그 외 화장실이 몇 번, 발레 교실 문이 몇 번 들락날락하고 광부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철 구조물이 병풍처럼 펼쳤다 접혔다 하며 형태를 바꾼다. 배경이 광산촌이니만큼 화려한 뮤지컬 무대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간결하면서 압축된 요소가 많은 무대이다. 빌리가 춤을 추어야 하니 공간은 비어있어야 하고 넓어야 한다. 대신 그 공간은 배우들의 에너지로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빌리 엘리어트>의 무대는 내내 휑하더라. 


파업 중인 광산 마을이 주는 스산하고 휑한 느낌은 성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아한 발레 장면이 무대를 채우는 순간 이전 장면과 더 큰 대비를 만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라이선스 작품인데다가 기술적인 무대가 아니라 아날로그적인 무대를 선택했으니 수동식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래서인지 세트가 들고나는 타이밍이 조금씩 느리다. ‘잠깐. 지금 무대 전환하고 있잖아’ 하듯이 극에 빠져든 감정을 세트가 탁 끊고 들어온다. 빌리의 방이 들어오고 나갈 때나 발레 교습소 화장실 세트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타인의 작업을 기다리는 기분이 든다. 그때마다 배우들은 착하게도 세트를 기다렸다가 다음 연기를 이어간다. 관객은 그때마다 0.01초쯤의 빈 공간을 인식하게 되고 그 기억이 모여 결국 ‘텅 빈 무대'라는 이미지를 남긴다. 이 0.01초들은 누가 메워야 하는가? 배우들은 관객이 그 빈틈을 보지 않고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더 부지런히 연기할 책임이 있다.



기술에 매몰된 연기

캐릭터를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배우들은 참 잘 한다. 7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할머니 역의 박정자의 무대는 배우의 아우라로 꽉 찬다. 작은 체구에도 대사 하나 몸짓 하나가 설득력을 가진다. 아버지 최명경 또한 거칠지만 실은 약하고 따뜻한 이면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을 잘 그려낸다. 윌킨슨 역의 최정원도 쿨하면서도 속 깊은 연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배우들이 여러 배우와 같이 무대 위에서 잘 어우러지는가 하면 제각각, 서로 섞이지 않는다. 특히 아버지와 윌킨슨 캐릭터는 자기애와 자기 연민이 너무 강해서 다른 캐릭터를 배려하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 보니 대사와 대사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에 자주 빈틈이 생기고 주고받는 감정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이 안 들고 덜그럭거린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미안하지만 빌리 역을 맡은 배우이다. 빌리들은 200대 1의 경쟁을 뚫고 오디션에 합격한 뒤에도 빌리 스쿨이라고 하는 액터 스쿨도 1년 반을 다닌다. 10대 초반의 어린 학생이 발레와 탭댄스와 아크로바틱과 노래와 연기까지 3시간 가까이 퇴장도 없이 무대에서 완벽하게 해내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기에 조심스러운 여러 차례의 오디션과 긴 연습 시간이 필요한 것일 테다. 그런데 우리가 <빌리 엘리어트>에서 기대하는 것이 단지 기예나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것을 활용한 드라마라고 한다면, 이 아역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춤보다는 연기여야 한다. 춤도 연기의 일부로서 존재해야 하고.


빌리 역의 배우는 발레도 잘 하고 동선이나 대사도 잘 외우고 실수도 안 했다. 게다가 와이어에 매달려 안개 자욱한 무대 위를 나는 장면(Swan Lake:백조의 호수)은 사뭇 감동적이다. 그런데 춤이 아닌 대사를 할 때면 이번에는 화내는 장면, 이제 돌아서는 순서, 다음은 소리 지르는 타이밍... 디렉션이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연기가 기껏 쌓아 올린 감동을 깨부순다. 무대에는 빌리가 아니라 감정 없이 정해진 순서에 맞추어 기계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다. 단지 어리거나 공연 초반이라서 그렇다고 하기엔 마이클이나 데비 역의 아역 배우는 아주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이 프로덕션은 빌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한 게 무엇이었을까. 어차피 극 중의 빌리는 발레에 재능이 있는 새싹이지 완성된 재목이 아니다. 그러니 발레를 완벽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기를 더 완벽에 가깝게 하도록 주문해야 한다. 시종일관 격양된 어조로 소리를 친다고 해서 빌리의 복잡한 마음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다. 아무리 빌리를 뽑을 때 아역 배우에게서 '날 것'을 원했다고 해도 빌리가 가진 진심까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빌리로서 날고 싶은 욕구는 가득하지만 날아오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로봇 같은 빌리를 보게 될 줄이야.



아이라도 배우라면 프로답게

빌리에 도전하는 아역 배우들의 오디션과 훈련 과정을 담은 TV 프로그램인 <영재발굴단-빌리 엘리어트> 편을 봤다. 거기서 트레이너가 훈련 중인 아이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프로답게 해야지. 이렇게 할 거면 무대에 서지 말아야지."


동감이다. 아이들에게 너무 모진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고생하고도 이렇게 감정없이 무대에 설 거면 무대에 서지 말아야지. 이건 학예회가 아니니깐 말이다. 어린아이가 무대에 오르면 일단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무대까지만이다. 비어있는 건 빌리의 감정이었고 휑한 무대였고 결국엔 기대에 미치지 못한 프로덕션의 역량이었나 싶다. ‘빈틈’을 잔뜩 보고 나온 마음이 쓰라리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 기대를 하려니 내가 아역 배우의 리얼 성장 다큐를 보려고 공연을 보는 건 아닌데. 차라리 <영재 발굴단>이 훨씬 감동스럽다. 거기서 보여준 빌리들의 감정은 순도 100%의 진심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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