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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어X Mar 15. 2018

유혹하지 않는 팜므파탈, 뮤지컬 <마타하리>

by reviewerX 토드

지난 2016년 첫선을 보인 EMK뮤지컬컴퍼니의 첫 창작뮤지컬 <마타하리>가 1년 만에 확 바뀐 모습으로 돌아왔다. 초연 당시 화려한 무대와 스타 캐스팅으로 흥행에는 성공했으나 ‘지루하다’는 평을 면치 못했던 작품이다. 재연은 영국 출신 연출가 스티븐 레인과 함께 대본, 음악, 연출, 안무, 무대 전반을 손봐 완성도를 높인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그 결과물을 보면 아직도 창작진은 자신들이 쥔 카드의 잠재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하다. 


실존 인물 ‘마타하리’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에서 관객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유럽을 뒤흔들었던 무희 마타하리의 이국적이고 농염한 춤, 그리고 그 매력과 명성을 이용해 펼쳐지는 아슬아슬한 스파이 활동일 것이다. 위험할 줄 알면서도 그녀에게 사로잡혀 울고 웃는 무수한 남정네들과의 로맨스는 덤이다. 



단적으로 말해 <마타하리>에는 이 세 가지가 없다. 먼저 재연의 마타하리는 춤추지 않는다. 초연에서는 공연 초반에 마타하리가 살로메처럼 베일을 한 겹씩 벗으며 사원의 춤을 추는 장면이 등장했다. 이 장면이 ‘유럽을 뒤흔든 아름다운 무희’라는 캐릭터에 설득력을 부여할 만큼 매혹적이지 않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어쨌거나 무희 마타하리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장면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재연에서 마타하리의 춤은 아예 존재감이 사라졌다. 마타하리의 춤은 독립적인 쇼가 아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 배경, 군무로만 존재하는데, 그조차도 마타하리 역 배우가 아닌 대역과 앙상블이 맡는다. 진짜 마타하리는 늘 무대가 아닌 분장실에만 존재한다. 그러니 그녀가 처음 등장해(첫 등장부터 분장실이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고위층 인사의 선물 앞에서, 또한 라두 대령 앞에서 위세를 뽐낼 때 관객은 의아해진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마타하리의 매력은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증명되지 못한 채 다른 인물들의 찬사 어린 대사 속에 상상으로만 존재한다. 


마타하리는 무희로서뿐 아니라 스파이로서도 탁월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라두의 협박 때문에 원치 않게 시작한 스파이 활동이라 해서 ‘비밀문서 셔틀’ 노릇이나 하는 무능한 스파이로 그려져야 했을까? 그녀는 이미 한번 매 맞는 아내에서 신비로운 ‘마타하리’로,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주어진 운명을 뒤집은 여인이 아니던가? 스파이 활동을 하며 얻어낸 새로운 정보나 라두가 자신에게 빠져있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의 가치를 걸고 라두에게 밀당 한번 해보지 못하는 마타하리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이 문제는 초연부터 줄곧 지적되어온 마타하리의 수동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치명적인 미모와 재능으로 남자를 울고 웃겨야 할 마타하리가 오히려 남자 때문에 울고 웃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은 초연부터 <마타하리>의 가장 큰 맹점으로 꼽혔다. 재연의 연출에서 이 문제를 의식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는 그저 마타하리가 라두의 스파이 제안을 좀 더 시크한 태도로 받아들이고, 아르망이 자신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한 사실을 알았을 때 잠깐 굳은 얼굴로 돌아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관객이 보고 싶은 것은 마타하리가 기구한 운명에 맞서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쏟아지는 타인의 기대와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매력과 재능을 사용하는 모습이다. 결말이 총대 앞에서 끝나는 비극일지라도 그 끝을 향해 질주하는 어느 한순간 마타하리는 눈부셔야 한다. 무희로서든, 스파이로서든, 팜므파탈로서든. 하지만 재연의 마타하리는 그 모든 분야에서 무능했다.



또 한 가지 재연에서 아리송한 것은 이 작품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쇼가 아닌 드라마에 방점을 찍겠다는 새 연출의 포부는 무대에서 낭만을 몰아냈다. 초연 당시 마타하리의 쇼를 컨셉으로 화려한 빛깔과 형태, 꿈꾸듯 유려한 전환을 자랑했던 무대 세트는 칙칙한 잿빛으로 변했다. 초연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혔던 화려한 무대를 포기하면서까지 재연에서 이룩하고자 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암울한 시대 배경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타하리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고, 라두와 아르망을 국가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든 바로 그 전쟁 말이다. 재연이 전쟁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점은 1막의 오프닝이 초연의 흥겨운 쇼 대신 전쟁에 신음하는 민중의 목소리로 대체된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전쟁의 비극성이 강화되면 비극적인 운명에 맞선 인물의 위대함도 돋보일 거라는 계산이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물들은 여전히 밋밋하고 우스꽝스럽다. 왜냐하면 이처럼 전쟁을 강조해놓고도 이 작품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는 모호하며 심지어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쓰러지고 여인들이 울부짖는 장면을 보면 무고한 피해를 낳는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하나, 아르망이 죽음의 비행을 앞두고 동료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겠노라’ 노래하는 장면은 다분히 군국주의적 낭만으로 가득하다. 마타하리는 어떤가. 그녀는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스파이가 되고 목숨까지 위협당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쟁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내비치지 않으며, 사실상 사랑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마타하리> 안에서 전쟁은 어떠한 성찰도 끌어내지 않는, 단지 비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한 일차원적 장치일 뿐이다. 그런데 그 효과가 정말 비극적인가? ‘나는 중립국 출신’이라며 전쟁에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다 그 전쟁 때문에 죽고 마는 마타하리의 삶은 비극보단 블랙 코미디에 어울린다.


이쯤 되면 애초에 왜 마타하리를 주인공으로 뮤지컬을 만들었는지가 궁금해질 따름이다. 주인공을 그저 시대가 낳은 평범한 희생양으로 그리고 싶었다면 죽는 순간에도 총구 앞에서 당당히 키스를 날렸다는 마타하리, ‘여명의 눈동자’라는 그 이름만으로 비범함을 꿈꾸게 만드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을 이유가 무엇인가? 한결같이 무능하고 무력한 <마타하리> 속 마타하리에게 운명에 맞선 여인이라는 수식어는 너무 과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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