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eviewerX 루시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전쟁 도중 북한 포로를 이송하던 배가 무인도에 난파하고, 그 무인도 안에서 대립하던 북한군과 남한군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동화처럼 그려낸 뮤지컬이다. 여신님과 전쟁. 참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단어이다. 이질적인 두 개의 단어가 만나서 동화 같은 전쟁 이야기라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제목부터 보여주듯이 이 극에는 여신이 등장한다. 그것도 제법 중요한 역할로 말이다.
여신의 역할
여신은 이 극의 배경인 1950년대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우리의 민속신앙은 자연 숭배 신앙을 기반으로 한다. 자연 숭배 신앙은 모든 자연 속에 신성한 영이 있다고 믿는 정령 신앙으로 발전했다. 즉 산에 산령, 물에 수령, 나무에 수목령, 바위에 암석령, 사람에게 인간령이 있다고 믿으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제각기의 정령이 실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산에는 산신령 있지, 바다에는 용왕님있지’라는 영범의 대사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군인들이 만난 무인도섬을 지키는 신은 여신이 아니라 섬신 정도의 이름이 붙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서 등장하는 신은 ‘섬신’이나 ‘무인도신’이 아닌 여신이다. 그 이유는 극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역할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라는 참혹한 적자생존의 상황에서 여성의 생물학적 열세는 큰 약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여성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이다. 그래서 전쟁으로 주제로 한 작품들은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극은 여타 전쟁극과 다르게 제목에서부터 여신, 즉 여성이 등장한다. 여기서의 여신은 단순한 여자라는 성별을 가진 신이 아니라 이상향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무인도에 남겨진 군인들은 각각 그리워하는 여성이 있다. 그것은 딸이기도 하고, 누이, 여동생,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결국 모두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상향을 나타낸다. 극 후반부에 모든 배우가 부르는 노래 ‘돌아갈 곳이 있어’에서 그것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이 부르짖는 돌아갈 곳은 여성의 품, 따뜻한 가정을 말하고 그것은 결국 전쟁 전의 평범한 일상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여신’은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적군과 밀폐된 공간에서 대치하는 위기상황에서 적도 나처럼 자기만의 ‘여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들은 심리적인 동질감을 형성하며 하나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이 ‘여신’은 그들이 하나 되었던 안정적인 비무장지대 무인도를 벗어나게 하는 가장 큰 동기로 작용한다. 각자 자신의 여신에게 돌아가기 위해 서로를 배신하기도 하고 목숨을 걸고 무인도를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여신의 또 다른 역할
이렇듯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서의 여신은 이야기의 흐름을 이끄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극에서 여신을 그리는 모습은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 일차원적이다.
이 극에는 6명의 남자배우와 1명의 여배우 총 7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2013년 초연 이후 5번이나 재공연되는 동안 많은 배우가 역할을 거쳐 갔다. 창섭이나 영범 순호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도 마른 사람도 덩치가 좋은 사람 등 같은 역할이어도 다양한 모습의 배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신님은 다르다. 배우와 상관없이 여신님을 맡은 배우는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가녀린 몸매와 까맣고 긴 머리에 하늘하늘한 모습의 배우들 뿐이었다.
또한 다른 배역들은 모두 6·25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알맞은 군복을 입고 있다. 그러나 여신님은 살랑살랑한 흰 드레스에 머리에는 화관을 끼고 있다. 이 극에서의 ‘여신님’은 6·25 전쟁 중의 여신님이 아니라 2017년 우리가 생각하는 여신님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도대체 왜 여신은 청순하며 가련해야 하는가. 이 극의 여신님의 역할은 이상향, 전쟁이 닥치기 전의 평범한 일상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여신님이 예쁘고 아름다워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 나이가 들거나 뚱뚱하거나 못생긴 여신님은 없는가. 마치 ‘여성’이 나이가 들거나 뚱뚱하거나 못생기면 그들의 이상향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군인들이 그리워하는 여성들의 이미지 또한 전형적이다. 희생적인 어머니, 생기발랄한 여동생, 청순가련한 누이의 모습은 어머니, 여동생, 누이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들이다. 이 여성들의 모습은 ‘여성성’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일반적인 형용사들을 실체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들을 조합하면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여신님은 결국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의 관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이상향은 ‘여성성’이 가득한 여자가 지고지순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곳이라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군인들이 그리워하는 모습은 실제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 말 그대로 이상향이기에 이상적인 여성상들이 나오고, 여신님은 환상적인 존재이기에 군복을 차려입은 현실적인 군인들과 다르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최근 몇 년 동안 만들어진 창작뮤지컬 중 손에 꼽히는 수작이다. 줄거리, 개연성, 음악, 무대 등 여러 분야에서 칭찬을 받았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1차원적인 여신의 모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시선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전쟁’과 ‘여신’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잘 조합해내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던 여성상은 벗어난 새로운 여신님을 만들어내었더라면 ‘전쟁 속에 피어난 휴머니즘’을 넘어 더 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