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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Aug 25. 2022

이런 보랏빛 시

#72) 박연준,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


당신은 보랏빛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이제 나는 박연준의 두 번째 시집을 떠올린다. 표지 색상이 보라색이어서가 아니고 그 반대다. 보랏빛의 시에 보라색 표지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보랏빛의 시'인가. 이 시집이 유난히 선명한 보랏빛을 띄는 것은 '멍' 때문이다. 멍든 시인의 멍든 시들이라고, 그러니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온몸에 푸르뎅뎅한 멍이 들고 그 낭자한 보랏빛을 스스로도 감당할 바 없어 각혈하듯 뱉어낸 말들이 저 시가 되었다고, 그녀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어도 나 홀로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쓸 내용은 이 시집에서 내가 찾은 그녀의 멍 자국들이다.


봄은 스무 개의 발이 달린 다족류의 몸으로 걸어다닌다
투명하게 찍힌 봄의 발자국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햇빛

아버지는 쓰러지길 기다리는 볼링 핀처럼
봄의 길목에 서 있었다
거대하게 몸을 부풀린 색색의 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오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빛깔을 향해,

(...)

아버지의 몸 곳곳에 멍이 퍼졌다
무늬를 흉내 내며 살랑거리는 저 어둠,
도망가는 뱀처럼 기다랗게 번지고
커다란 접시 같은 몸이 보랏빛을 떠받들고 있었다
보랏빛은 줄을 서지 않는다
보랏빛은 발걸음이 가볍다
보랏빛은 침착한 표정으로 번진다 웃으면서
보라, 보라, 보랏빛!

종이비행기처럼 납작하게 접힌 아버지
하늘로 날아가신다

-44~45면, 「봄, 우아한 게임」 부분


ㅡ 박연준의 첫 번째 시집을 읽은 우리는, 그녀에게 아버지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그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바쳐질 이 시에서 "보랏빛"의 정체가 나타난다. 봄, 꽃이 피고 동면에 들어갔던 동물들이 일제히 깨어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아버지는 "뱀처럼 기다랗게 번지"는 멍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다. 그 보랏빛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충격이었을지, 보랏빛이 몸 위로 떠오른 게 아니라 몸이 보랏빛을 "떠받들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병든 아버지의 몸은 그저 보랏빛을 담은 일종의 "접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ㅡ 저 살아 숨 쉬는 듯한 보랏빛의 횡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아버지의 상태와 지나치게 비교된다. 딸과 처제도 구분하지 못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쓰러지길 기다리는 볼링 핀"으로 묘사될 때 보랏빛은 "발걸음이 가볍"고 "침착한 표정으로" 웃기도 하는 존재로 그려지는데, 차라리 아버지보다 그의 몸 위의 멍이 더 살아 있는 듯하지 않은가. 어쩌면 멍은, 하루 종일 병상에 죽은 듯 누워만 있었을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시인이 유일하게 생동감을 발견했던 곳이 아니었을까. 유일한 생명의 흔적이 고통을 통해서만 확인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ㅡ 어릴 적 넘어지곤 해서 생기는 멍은 그저 잠시 찾아왔다가 곧 사라지는 것에 불과했지만, 생의 어느 기점을 통과하고 나서부터는 한번 생기면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멍도 있는 걸까. 우리의 시인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그렇듯이 말이다. "문장을 끝내면 마침표를 찍고 싶은 욕구처럼/생각의 끝엔 항상 당신이 찍힌다"(「푸른 멍이 흰 잠이 되기까지」 중). 모든 생각의 끝에 아팠던 아버지가 따라온다는 저 말이 진실이라면, 이제 아버지의 멍은 시인의 멍이 되어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지울 수도 없고 모른 척할 수도 없어서, 영원히 간직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저 생동한 멍. 시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여름의 끝」 중). 어떤 고통을 영원히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ㅡ 이제 나는 이 슬픈 보랏빛의 시 앞에 문학이란 절망의 형식이라던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떠올린다. 우리의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므로 박연준의 시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배운다면 그것은 절망과 절망의 언어일 것이다. 그녀가 매 순간 오직 절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취미로 발레를 즐겨 하며 때로는 동료 시인이나 작가들과 즐거운 식사를 함께 한다. 그러나 유독 시 안에서는 그토록 아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것이다. 그녀의 시가 절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득한 절망만이 시의 옷을 입고 나타날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08.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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