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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04. 2022

언어 슬랩스틱

#78번째 책) 오은,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2016)


오은의 시집을 펼치며 찰리 채플린을 생각한다. 찰리 채플린이 누구였더라. 그를 단순히 ‘연기 잘하는 배우’나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감독’ 등으로 떠올리는 일은 재미없다. 이렇게 불러 볼까. 그는 ‘넘어지는 사람’이다. 그냥 넘어지는 것이 아니고 천재적으로 넘어지는 사람, 가히 예술적으로 넘어지는 사람이다. 『모던 타임즈』(1936) 속 유명한 장면을 다들 아실 것이다. 쉼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기계적’으로 부품을 조립하는 노동자가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다 못해 기계 속으로 들어가 톱니바퀴 사이에 끼인 채로, 말 그대로 기계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당시 산업 혁명 시대 한 노동자의 이 비참한 ‘넘어짐’을 누가 단순한 ‘몸 개그’로 치부할 수 있는가. 그는 넘어지면서 세상을 웃기고, 넘어지면서 세상을 울리고, 마침내 넘어지면서 한 시대를 넘어뜨린 장본인이다.


꿀맛이 왜 달콤한 줄 아니?
꾼 맛도 아니고 꾸는 맛도 아니어서 그래.
미래니까,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몰라서 달콤한 말들이 주머니 속에 많았다.

-「시인의 말」 중에서.


ㅡ 여기 언어 위에서 넘어지는 한 시인이 있다. 그의 예술적인 ‘꽈당’을 보라. 그는 말한다. “꿀맛이 왜 달콤한 줄 아니?/꾼 맛도 아니고 꾸는 맛도 아니어서 그래./미래니까”. 바보야, “꿀맛”의 ‘꿀’은 그 ‘꿀’(dreaming)이 아니라 이 ‘꿀’(honey)이야. 채플린의 영화였다면 주인공은 저런 지적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세상이 기계적 질서대로 흘러가고 그 엄정한 규칙 속에 인간성이라는 특질은 장애물로 취급받는 시대에, 채플린의 자유로운 몸짓은 언제나 낭비에 불과했다. 효율적으로 일하지 못하는 그는 ‘쓸모없는’ 부품일 뿐이다. “꿀맛”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이 시인도 마찬가지. 그는 정해진 언어적 질서 위에서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자꾸만 넘어지는 사람이다. “꿀맛”의 통용되는 의미를 그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가능한 말. 그러니까 언어 위에서 일부러 넘어지고 있는 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좋은 냄새가 나는 방에 들어갔어. 숨을 힘껏 들이쉴 수 없었어. 그 냄새들이 내 몸속으로 다 날아들까봐. (…) 좋은 냄새가 나는 방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방"이라고 말했어. 방과 냄새가 한 몸이 됐어.

(…)

나는 "방"이라고 말했어. 방과 내가 한 몸이 됐어. 빈 방이 좋은 냄새로 가득 차올랐어. 냄새의 방향을 따라 방 안이 집요해졌어. (…)

-145~147면, 「좋은 냄새가 나는 방」 부분


ㅡ 가령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동생과 현주를 만나러 갔다.' 이 평범해 보이는 문장은 실은 평범하지 않다. 여기에는 무수한 오해가 겹쳐 있다. 먼저 1) '나'와 '동생', 두 사람이 '현주'를 만나러 갔다,는 얘기일 수 있다. 그러나 2) '나'가 홀로 '동생'과 '현주', 이 두 사람을 만나러 갔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이 발상을 극단적으로 밀고 간다면, 3) '날고 있는'(fly) 동생과 함께 '현주'를 만나러 갔다,는 식의 얘기도 가능해진다. 억지라고 무시할 것이 못 된다. 이 예시는 우리 언어가 실은 꽤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ㅡ 위의 시는 이 발상으로부터 탄생했다. "좋은 냄새가 나는 방"은 언뜻 평범한 문장으로 보이지만, 저 평범함을 조각조각 해체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언어 위에서 살아가는지 느끼게 된다. 저 문장은, 1) 좋은 냄새를 풍기는 방(room)을 의미할 수도, 2) 좋은 냄새가 나는 '방향'을 의미할 수도, 심지어는 3) 의인화된 "좋은 냄새"가 "나는 방"이라고 말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물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방"의 의미를 헷갈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 평범한 일상 자체를 부정한다. 일부러 의미를 헷갈리고 일부러 뜻을 혼동하며 일부러 단어를 오용한다. 하나 더 읽어보자.


홀에는 사람이 많았다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홀에 있었다
홀이 사람과 있었다

홀이 쓸쓸할 때
홀로 있을 때

홀이 가장 쓸쓸할 때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홀연히 사라져버렸을 때

홀수가 되었을 때

홀에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있었던 자리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옷에 구멍이 난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 구멍 속으로 온몸을 숨기고 싶었다

접시가 실려 가고
샹들리에가 꺼지고
그림자가 사라지고
텅 빈 공간에
적막이 텅 내려앉을 때

홀몸이 되었을 때
식은 줄도 모르고
마음은 곁을 향할 때

그새가 홀홀 날아가
홀이 홀로 빨려 들어갔을 때

홀은 홀로서
커다란 구멍이 되었다

홀이 있었다
홀이 사람에 있었다

-172~174면, 「홀」 전문


ㅡ 이번에 그의 시야에 포착된 것은 바로 '홀'이라는 말이다. 저 말 또한 시인에게 온갖 혼란을 야기한다. 1) 건물 안의 넓은 공간으로서의 '홀'(hall), 2) "홀수"의 '홀', 3) '혼자 있는 사람'을 말할 때의 '홀', 4) 구멍(hole), 5) "홀홀"이라는 의태어 ……. 이처럼 '홀'이라는 말이 수많은 변용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사람이 홀에 있었다"라는 단순한 진술이 "홀이 사람에 있었다"는 이상한 명제에 도달하기까지 이른다. 그가 없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말의 관습을 깨고 거기서 새로운 용법을 끌어낸 것이다. 그러니까 무에서 유가 아니라 유에서 유를, 말하자면 존재적 유에서 실천적 유를 창조한 것이다.

ㅡ 다시 말하지만 그가 한국어 문법에 익숙지 않아서 저런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저 비문(非文)들의 향연은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풍자적이다. 시인 오은이 자신의 첫 시집에서부터 화려하게 구사하고 있는 저 '언어유희'의 테크닉을, 시인 자신은 "말놀이"라 불렀고 시인 김언은 "말사태"라 이름 붙였으며, 평론가 권혁웅은 "혁명"이라 명명했다. 다 맞는 말이지만 한 술 보태자면, 나는 '슬랩스틱'이라 부르려 한다. 언어 위에서 현란하게 자빠지고 나동그라지며 엉덩방아 찧는 솜씨는 실로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하지 않는가.

ㅡ 그들의 웃는 얼굴 뒤에 서글픈 표정을 읽어낼 줄 아는 자만이, 저 우아한 '블랙 코미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예술적으로 넘어지는 순간, 그 우스꽝스러운 우아함은 웃기면서 슬프고, 가벼우면서 진지하다. 수십 년 전 영국의 한 천재가 '몸짓'만으로 그것을 해냈고, 지금 한국에서 그의 후예가 '언어'로 오마주하고 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영화를 통해, 또 한 사람은 시(詩)를 통해 같은 곳에 도착한다.



1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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