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기억은 나의 거름이 된다.
한 발짝, 한 발짝.
머릿속을 휘젓는 기억을 따라 발끝을 내딛는다.
너무 오래 묵혀두어 잊혀졌던 과거가 소용돌이를 치며 머릿속에서 폭풍우를 만든다. 어지럽게 뒤섞여버린 기억을 따라 몸을 맡긴다. 때로는 강렬함에 때로는 유약함에 흔들리며, 오늘날 나를 만든 기억의 회오리 속을 허우적거린다. 행복했던 기억, 잊고 있던 기억, 사랑했던 기억, 세상이 무너졌던 기억, 알고 싶지 않았던 기억까지 모두 하나가 되어 지금의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나의 분신이지만 온전히 나라고 할 수 없는 기억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형체를 가진 발레리나를 탄생시킨다. 형체가 없던 몸짓이 부드러운 손짓이 되고, 강약없던 안무가 강력한 눈빛이 된다. 나를 집어삼키려는 나의 폭풍우 같은 기억과, 나로써 온전히 새로 태어나려는 내가 모여 폭풍우에 굴복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건 춤의 사투를 벌인다. 마치 폭풍우 속에서 춤추는 발레리나처럼.
기억은 무의식 속 깊은 곳까지 침투하여 나를 공격하고, 그것을 애써 춤으로 승화시켜 태워버리는 내가 있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기억에 새까만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직 자신만의 감각과 직감에 의지한채 외로운 폭풍우와의 싸움을 이어간다. 자그마한 외부자극에도 무너지던 나는 울면서도 춤을 추고, 웃으면서도 춤을 춘다. 머릿속을 침투하는 기억에 따라 사랑을 발산하기도, 증오를 발산하기도 한다. 폭풍우를 무대 삼아 차라리 폭풍우를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승천한다. 바람을 타고, 폭풍을 타고 올라갈수록 가장 순수한 영혼에 가까운 나와 마주한다. 아무런 말도, 설명도 필요없는 그곳에서 서로를 응시한채 오직 열렬한 춤사위로만 못다한 이야기를 나눈다. 눈빛만 보아도 이야기가 철철 흘러 넘치지만, 함부로 서로의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한다. 나의 영혼은 관망하듯 내 주변을 배회하고, 나는 지쳐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며 필사적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처음으로 영혼이 한 발짝 다가오려는 찰나, 내 기억 속에서 새어나온 검은 그림자들이 주위를 에워싼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흐느낌과 괴성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잠들어있던 기억 하나가 옆구리를 창에 찔린듯 오열을 하며 세상 밖으로 새어 나온다. 세상은 다시 폭풍우와 먹구름으로 뒤덮힌다. 겨우 손에 잡힐 듯 했던 가장 순수한 내 영혼은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나를 둘러싼 그림자들은 검은 파도가 되어 다시 나를 집어삼킨다.
그래도 춤은 이어진다. 내 세상이 흔들릴수록 더 격렬한 춤사위가 완성된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리듬에, 내 몸도 처음 타보는 춤사위를 뽐낸다. 내 세상이 요동칠수록 나는 자꾸만 더 과감해진다. 가냘펐던 첫 한 발짝은 이제 온몸이 꺾어질듯 과격해진다. 마침내, 잠들어있던 또 다른 기억이 깨어나 무질서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감각해져있던 나의 동작에 호흡을 불어넣는다. 그동안 여리여리한 리듬에 맞추느라 함부로 내보이지 못했던 동작들을 과감히 표출한다. 나도 몰랐던 기억들이 깨어나 내게 자유를 부여한다. 더이상 늘 추던 춤만 출 필요가 없이 이제는 내 몸 속에 완전히 흡수된 기억을 새롭게 내 마음대로 섞어 선보인다.
온갖 기억 속에서 단련이 된 근육이 나도 알지 못했던 갖가지 기교를 뽐낸다. 살기 위한 사투로 시작했던 춤 대결이 어느새 나를 위한 무대로 뒤바뀌었다. 폭풍우는 나를 더 뽐내게 해줄 배경에 불과하다. 나를 공격하던 검은 그림자들은 나를 더 돋보이게 하는 백업 댄서에 불과하다. 손끝에서 발끝에서 뿜어 나오는 스스로의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다. 새로운 힘은 새로운 기억을 탄생시킨다. 새로운 기억은 새로운 영혼을 구성한다. 가장 순수했던 영혼은 이제 끝없이 상처받는 존재가 아닌 상처를 통해 성장하고 단단해지는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