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처맞는 것도 맞다 보면 실력이 는다. 정확히는 주먹에 익숙해지고, 맷집도 늘면서 주먹이 사정없이 날아오는 순간에도 사고회로를 돌릴 수 있는 차가운 머리를 얻게 된다.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이 극명하게 갈리는 무대.
링에 올라가면, 사각 케이지 안에서 공정한 룰에 의해 나의 강함을 평가받는다.
메이웨더도 타이슨도 로마첸코도 은가누도 맞으면 쓰러진다. 승자는 서있고 패자는 무릎 꿇는다.
<간호사 아저씨 이야기>
나는 주에 2번 정도는 매서드(method boxing, 가벼운 1:1 연습)나 스파링을 한다. 오늘도 스파링 2라운드 정도를 찐하게 했다. 땀은 흠뻑 흘러내리고 숨은 헐떡 거리면서 링 바닥에 누워 상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파링 간 서로 좋았던 점, 부족했던 점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잽의 각도는 좋았는지, 뒷 손이 나가는 타이밍이나, 콤비네이션이 뻔하진 않았는지, 안 좋은 버릇은 없었는지(가드가 자꾸 내려간다던가, 지친 티를 너무 낸다던가). 그렇게 서로에게 도움 될 만한 것들을 공유하면 그날의 스파링은 성공적이다. 스파링은 시합이 아니다. 이기고 지는 걸 따지려면 시합을 나가야 한다. 그렇게 서로 피드백이 끝나고, 질문 하나를 더 했다.
’어쩌다가 복싱을 배우시기로 마음먹었어요? 쉽지 않은 운동인데, 어떤 계기 같은 게 있었나요?‘
오늘의 주인공은 간호사다.
나이는 30대 초반, 175cm 정도에, 72~75kg, 대학 병원에서 일하고 있고, 느껴지는 기운 자체가 사람 참 순하고 착한 것 같다.
키 때문인지 조금 슬림해 보이고, 말도 조근조근 하는 스타일에 늘 허허 웃으시는 편이다.
샌드백을 치거나 쉐도우를 할 때 몇 번, 요즘 정부와 의사 집단 간의 정치적 이슈 때문에 업무에 부담은 없는지, 간호사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남자 간호사들은 주로 어떤 여성들을 만나고 결혼하는지, 이런저런 가볍고 무거운 복싱외 주제로는 이야기 해봤지만 정작 복싱을 왜 시작했는지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 순한 양반이 이 격한 운동을 왜 시작했을까. 갑자기 궁금했다.
‘친구 따라왔어요. 친구가 배워보고 싶었다는데 같이 가서 배우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너 여자 친구랑 헤어져서 힘들지 않냐, 네가 차인건 네가 너무 순하고 착해빠져서 그런 거야, 매력이 없어 매력이, 너한텐 남성미가 필요해, 닥치고 따라와, 가자 ‘
‘그래서 그냥 친구 따라왔어요. 저는 사실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그다지 힘들지 않았는데 옆에서 친구가 자꾸 조잘거리니까 오게 됐네요 하하 근데 그 친구는 부상 때문에 그만 뒀고 저는 계속 하고 있어요‘
‘그렇군요ㅎ 그래서 남성미는 좀 찾으셨나요?’
‘아뇨 그런 거 같진 않은데요? 하하‘
사실 난 알고 있다.
그의 전투력과 눈빛이 이전과 아주 바뀌었다는 걸.
몇 달 전, 그와 처음 스파링을 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미소가 지어진다.
스파링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생전 처음 맞아보는 주먹에 당황한다. 그것도 엄청.
주먹이 얼굴에 날아와 크게 한 방 맞으면, 심장은 빠르게 뛰고, 머리는 뜨거워진다. 작은 창으로 세상을 내다보듯, 헤드기어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그 위로 상대의 큰 글로브가 내 얼굴로 날아오면, 헤드기어 쿠션을 넘어 전달되는 둔탁한 충격에 머리가 울리면서 어쩔 줄 모르게 된다. 패닉이다 패닉.
그렇게 한 방 맞고 나면 허공에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 사람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등지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고, 앞을 보지도 않고 상체를 둥글게 말아 팔과 글러브로 얼굴을 가리고는 바닥을 보며 움츠려 드는 사람도 있다.
이분은 가드를 하고 바닥을 보며 웅크리는 타입이었다.
사실, 스파링이든 시합이든 이렇게 앞의 상대를 제대로 보지 않는 행위는 자살 행위다.
반격 없이 움츠려든 몸은 상대방에겐 그냥 고깃덩이 샌드백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는 이 분도 그런 타입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힘을 주고 얼굴 쪽을 퉁퉁 쳐도 웅크리지 않는다. 눈빛은 살아있고 또렷하게 나를 마주하는 게 느껴진다.
상대가 그렇게 서 있으면, 반대편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저 상대가 내 주먹을 참아내고, 뭔가 하려는구나’라는 생각에 섣불리 주먹을 내지 못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하필이면 주먹과 손이 빠른 아웃복서랑 많이 하다 보니, 정신없이 맞다가 라운드가 끝나곤 했다.
내게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나는 나보나 실력이 낮은 사람에게는 라운드 내내 세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 분들과 할 때는 한 번 세게 쳤으면, 정신을 다잡을 수 있도록 시간 텀을 주고 기다린다. 복싱을 함께 수련하는 동료로서 도와주는 거다. 때때로 내 약점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렇게 몇 주 같이 하다 보면, 상대가 내 복싱 스타일에 익숙해져 오히려 내가 큰 부담을 느낄 정도로 실력이 확 오른다. 그러면 나는 또 내 약점을 이겨내기 위해 대응책을 찾고 연습한다. 그러다 보면 내 실력도 덩달아 올라간다. 선순환이다.
복싱 시작하고 제일 신기했던 경험을 뽑으라면, 단연코 1번은 맞는 거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진짜 센 주먹은 누구에게나 힘들지만(이건 세계 챔피언도 같을 거다).
이 부분이 격투기 종목을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 간의 가장 큰 격차가 아닐까 싶다. 양아치든 동네 쌈꾼이든 1년에 얼굴에 주먹이 날아오는 상황이 몇 번이나 있을까.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같이 겪는 상황이다.
그렇게 서로 복싱을 왜 시작했는지부터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까지 자연스레 넘어갔다.
실생활에서는 주먹질할 일은 없겠지만, 더더욱 없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 도처에 주먹을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며 웃었다.
인간들이 참 간사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어떤 집단에 속해 있던 간에 성별, 나이 불문하고 내가 이겨 먹을 수 있는 사람, 괴롭혀도 될 사람을 골라 다르게 대한다는 거다.
회사에서도 보면, 유독 여직원들에게만 목소리 올려가며 센척하는 부장 아저씨들,
유독 인턴이나 신입 사원에게만 틱틱 거리며 표독스럽게 말하는 30대 과장 아줌마들,
굳이 뒷골목 시장잡배와 마주한 상황이 아니라도 우리 삶의 도처에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나의 의지와 행동을 짓누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군상에 잡아 먹히지 않으려면 실제로 싸워서 증명해도 되겠지만,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된다.
그들 입장에서 우리가 서로 싸웠을 때 비록 자신이 이길지라도 저놈이 내게 어떤 큰 상처를 남길 것만 같다는 압박감 정도만 있어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런 사람이면 충분하겠다.
예컨대, 내가 이긴다 하더라도 저놈이 지랄발광(감사실, 인권위, 노조 등에 신고)을 하는 바람에 회사에서 입지가 줄어들거나, 실제로 싸웠을 때 비록 내가 물리적 다툼에서는 이겼을지라도 팔 하나 발목 하나를 잃게 되어, 남은 인생을 불구로 살아야 될지 모르게 만드는 대상, 섣불리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방어력을 갖춘 사람 말이다.
일전에 선수가 스파링을 받아 준 적 있는데, 그분이 말하길 야수성을 껐다 켜는 법을 익혀야 된다고 했다.
특히 직장인들은 늘 자기감정과 의지를 억누르면서 살다 보니, 체육관에서 운동하시는 분들을 보면 과할 정도로 매너가 좋고,
강도 높은 풀 스파링에서도 주먹을 정말 내야 할 때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물론 매너 좋고, 예의 있고, 친절한 것도 좋지만,
서로 합의하에 할 땐, 제대로 내지를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훈련이 잘 되면, 라운드 시작 종이 땡 하고 울리는 순간 야수성 스위치가 켜지고, 라운드 종이 다시 울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90도로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다.
법 없이도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아갈 우리가, 법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을 언제 만날지 모른다.
야속하게도 그럴 땐 법은 멀리 있고 주먹은 가깝다. 언제나 줄행랑이 상책이라지만 도망가야 할 때 내 등 뒤에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다면...
자동차 보험, 실손 보험, 연금 저축, 퇴직연금, 국민연금... 그리고 복싱 보험!
앞으로 종종 복싱장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글을 써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