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ㅣ <퀸스갬빗>(2020)
퀸스갬빗은 '넷플릭스 오리지널'에서 핫(HOT) 한 작품 중 하나다. 2020년 10월 첫 선을 보였으며 총 7부작으로 구성돼 있다. 1950~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내며 건물 관리인에게 체스를 배워 세계 챔피언으로 거듭나는 천재 여성 '엘리자베스 하먼'의 이야기다.
1. 잔졸람에 투영된 시대상은?
‘퀸스갬빗’을 보는 내내 작품의 주요 소재인 ‘체스’ 만큼이나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게 있다. 바로 극 중 ‘잔졸람(XANZOLAM)’이라 명시된 초록약이다.
이 약은 엘리자베스 하먼(이하 베스 하먼)이 9살에 엄마를 잃고 들어간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먹인 신경 안정제다. 베스 하먼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불안을 가라앉히고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이 약에 의존한다. 약에 중독된 것은 베스 하먼 뿐만이 아니다. 그녀를 입양해 키운 양 엄마마저 초록약을 자주 복용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 시절에는 고아원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신경 안정제를 상시 복용하게 하는 경우도 많았고, 광고에서는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약처럼 홍보되기도 했단다. 초록약의 1차적 의미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적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을지 보여주는 매개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1950년대 여성들은 왜 신경 안정제에 의존했을까. 아니,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이는 ‘여성과 남성의 지위’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와 연관이 있다. 실제로 1950년대 미국은 ‘여성들의 가정 안주’를 최선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1956년에 《라이프》에 실린 한 기사에는 “여성들에게도 머리가 있으니 반드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가정에 관심을 쏟아야 하며 남녀의 책임을 서로 바꾸거나 서로 경쟁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있다. 또 1950년대 중반에 미국의 광고 전문가들은 주부들이 살림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시대적 분위기는 ‘퀸스갬빗’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이 화려한 차림과 화장을 한 것으로도 표현된다.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영화에서도 1950년대 미국 여성의 처지가 어땠는지 엿볼 수 있다. 여대생들은 미술작품의 작가‧역사 등을 줄줄 읊을 정도로 똑똑하지만, 이들의 꿈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주부가 되는 것이다. 캐서린은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약혼자와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고 가정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한다.
2. 베스 하먼은 우리 안에 있다
만약 시대상에 순응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는 데 그쳤다면 ‘퀸스갬빗’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퀸스갬빗’은 베스 하먼이 먹는 초록약을 활용해 기존 작품들과 약간의 차별성을 뒀다.
초록약은 남성 중심의 보수적 사회에서 집안일 말고는 크게 할 일이 없었던 여성들이 스트레스와 우울감의 해결책으로 섭취하는 대상으로 그려지면서도, 베스 하먼에게 만큼은 잠재력을 끌어내는 도구로 쓰인다.
이는 ‘퀸스갬빗’이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개척하는 1950년대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스스로의 의지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한 개인의 성장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극 초반 부모를 잃고 홀로가 된 베스 하먼은 알약이 주는 부작용을 알면서 일시적인 안정감을 찾기 위해 약을 먹는다. 알약은 그녀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는 부모, 친구와 비슷한 존재다. 그러나 극 후반부로 가면서 그녀는 약을 자연스럽게 조금씩 멀리한다. 대신 당당히 남성들의 세계에서 자신을 알리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법을 배운다.
특히 마지막 회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초록약의 도움 없이 마지막 보르코르와의 경기에 임한다. 이때 그녀의 능력치는 약을 먹고 경기를 치른 지난 경기들보다 제대로 발휘된다.
약을 먹지 않아도 체스판이 그녀의 머릿속에 뜨는 장면을 보면서 내심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이는 맨정신으로 강박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베스 하먼이 성장했으며, 약에 늘 패배하던 자신의 과거와 싸워 이겼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남성의 시각에서) 집안일 말고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여성이 체스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는 이야기에서 느끼는 통쾌함보다 더 큰 통쾌함이 들었다.
또 베스 하먼의 성장은 앞서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외도하는 남편 때문에 베스 하먼과 유사한 불안감을 겪은 양 엄마가 끝내 자살을 택한 것과 대비된다.
참고로 ‘퀸스갬빗’은 실화가 아닌 1983년 윌터 테비스의 동명 소설 ‘퀸스갬빗’을 각색한 드라마다. 스포츠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암울한 시대상과 함께 한 소녀가 단단하게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베스 하먼은 우리가 될 수도 있다. 2020년에도 1950년대의 성별차별만큼이나 빈부격차와 학연‧지연 등으로 대표되는 계급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외부적 요인과 내면의 불안감으로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인생의 고비에서 어떻게 정신력을 발휘하고 위기를 헤쳐나가야할지 ‘퀸스갬빗’이 시사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