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 서울 284, 그리고 커피 사회
3년 전, 디자인 전공 수업에서 문화역 서울284와 관련된 공간 리뉴얼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그 당시 [반 고흐 인사이드 : 빛과 음악의 축제]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화려한 색채의 미디어 프로젝션과 사운드 등 멀티미디어 전시 형식에 대해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반 고흐’와 ‘문화역 서울’이라는 기존의 공간과의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담긴 역사나 문화를 알 수 있는 연출또한 없었다.
결국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피상적인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때 이곳에 담긴 역사나 문화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이해했다면 보다 좋은 결과물이 나왔겠다는 뒤늦은 아쉬움이 든다.
그로부터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오늘날, 오랜만에 이곳을 찾았다. 근현대 생활문화에 녹아들어간 커피 문화를 다룬 이번 전시 [커피사회]의 기획과 연출은 공간의 역사와 아주 훌륭하게 맞물려 있었다. 아주 깊이 감명받았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에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계획적으로 총 세 차례를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다른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를 경험했고, 다시 찾았을 때는 과거와 현재의 교집합 요소들을 눈여겨보았다. 공간에 관한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며 어떤 이야기들이 담긴 곳인지, 또 어떤 것들을 전달하고자 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고서 세 번째 방문을 했다.
분명 같은 공간인데도 그곳에 담긴 이야기들을 알고 나니 전혀 다르게 보였다.
이곳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근대의 역사와 문화예술까지 가지를 치며 멀리멀리 뻗어나가지만,
이 글에서는 지금 주최중인 전시와의 어우러짐과 연관 지어 이곳에 담긴 이야기,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분위기를 담아보려 한다.
먼저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면, 문화역 서울 284는 브랜딩이 잘 되어있다.
중앙의 돔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구 서울역의 형태를 조형화해 로고타입을 만들었고,
밝은 명도의 주황색 시그니처 컬러(아마도 벽면의 컬러에서 따왔을 것이라 추정된다.)를 사용함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교차점을 아이덴티티로 잘 표현했다.
특히 공간 투어 리플렛을 마련해 비교적 동선이 복잡해질 수 있는 내부를 보다 쉽게 투어 할 수 있도록 돕거나, 미디어 기술이 결합된 카트를 제작함으로써 공간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연출한 점에서 기획자의 배려와 세심함이 느껴졌다.
카트 작업은 스튜디오 씨오엠이 형태 작업, 소프트웨어인 아카이브 미디어는 스튜디오 레벨나인에서 맡아했다고 한다. 협업 스튜디오 선정에서부터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트렌디하게 맞추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그 안에 담긴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번 전시를 통해 직접 경험했기에 간략하게나마 설명해보려 한다.
우리나라 철도 역사의 시작은 1900년 제물포와 서대문역을 잇는 경인철도였다. 이때의 남대문 정거장이 1925년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지어졌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구 서울역이다. 붉은 벽돌, 청동색 돔, 좌우 대칭 형태 등 르네상스 양식을 차용한 서양식 건축물에 내부의 높은 천정과 석조 건축물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낯설고 새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 설계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서울역 내부에서 발견된 도면에 적혀 있는 일본인 건축가 '쓰카모토 야스시'일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
[커피사회]는 근현대생활문화에 녹아들어간 커피문화의 변천사를 조명하고 일상 속에서 만나는 우리 사회의 커피문화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기획되었다.
<생략>
맛과 향기 속에 담겨진 역사와 문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커피를 통한 사회문화읽기라는 즐거운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커피사회 中 >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입장권 커피 컵을 받을 수 있다.
방식도 독특하지만 금장 스티커와 하단 로고까지 얼마나 많은 고심이 함께했을지가 느껴진다.
처음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중앙홀.
구 서울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곳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대합실로 이동했다.
대합실은 좌, 우로 나뉘었고 용도가 달랐다. 좌측은 1,2등 대합실로 당시 남녀 칠 세 부동석 문화에 따라 남녀를 구분 지었고, 우측은 3등 대합실로 남녀 모두가 함께 기차를 기다리는 공간이었다. 일단 기차에 탑승하면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착석했기 때문에 사람 구별 없이 섞여 있는 상황이 그들에게는 놀라운 광경이었다고 한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 친소 다 같이 익히 지내니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 최남선, 경부철도가 (1908)
지금의 이곳에는 디자이너 박길종의 웅장한 '커피, 케이크. 트리'라는 작품이 놓여있다.
빈티지한 색감의 벨벳, 다방에서 사용하던 물건들, 움직이는 장난감 기차, 그리고 상단부에는 원형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커피를 마시는 듯한 장면 연출까지 전시 콘텐츠를 상징하는 각각의 요소들을 진열해 시대의 무드를 나타내고 있다.
좌측의 1,2등 대합실이었던 공간은 '제비다방과 예술가들의 질주'라는 이름으로 다방문화의 시작과 당시 예술가들의 문화를 설명하고 있다.
카페와 다방은 근대의 대표적 유흥 공간이었다.
여기서 '카페'는 오늘날의 카페와 의미가 다르다. 현재의 카페는 커피와 차를 파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여급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파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다방'이 오늘날의 카페와 의미가 상통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커피는 서양 문물과 분위기의 상징이었으므로, 다방은 내부에 야자나무가 놓여 있다거나, 양주와 기모노, 재즈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등 이국적 취향과 더불어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이른바 모던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이었다. 동시에 서양색과 일본색이 착중된 모습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예술가와 문화인들은 ‘차’를 파는 다방과 차를 파는 ‘기분’을 파는 다방을 구분 지었다.
- 마치 오늘날 우리가 취향이 담긴 카페와 프랜차이즈 카페를 구분 짓는 것처럼 -
후자의 경우는 귀족적이고 폐쇄적인, 주로 예술가가 운영하는 다방이었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과 문화 예술인들의 주요 모임 장소로서 유럽식의 살롱 문화를 다방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커피를 구실 삼아 문화와 예술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 당시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멕시코 다방은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자 적자를 보면서도 가게를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이렇듯 예술인들이 운영하다 보니 수지맞는 경영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
재미있는 점은 경영자나 위치에 따라 다방의 인테리어는 물론 음악 특색도 달랐다는 것이다. 예컨대 낙랑은 세레나데, 비너스는 조선 유행가, 모나리자는 미국풍 재즈 식으로 음악과 사람이 만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을 창출했다.
다방마다 내세우는 정취가 다르니 여러 지점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또한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행위를 일컬어 다점 순례, 다방 취미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카페 투어와도 비슷한 듯하다.
다만 요즘은 그것을 문화생활, 취미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나 당시에는 종일 다방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금붕어(온 종일 다방을 돌아다니며 물만 마시는 사람), 벽화(꼼짝없이 앉아있는 사람)라고 빗대어 놀리듯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돌아다니면서 탐구하는 자로서의 산책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게으른 몽상가, 무기력한 지식인들의 집합으로 여겨졌다.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구보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 보내는 장소 다방이나 카페였고, 그에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
당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의 모습, 식민지 조선의 한 표상인 것이다.
아편처럼 진한 커피 속에
켜지는 등불……
사람들은 모두
불나비의 넋으로
불나비의 넋으로 모여든다
조광, 다방 (1940)
그 당시 커피의 의미는 근대의 기분을 낼 수 있는 낭만적인 음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식민지배를 받는 나라 지식인들의 슬픈 운명을 담은 한(恨)의 음료이기도 했다.
광활한 홀과 높은 천장, 화려한 샹들리에로 연출된 양식당, 그릴은 유행의 첨단이자 고급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옆쪽의 소식당에서는 중앙홀을 바라보며 식사를 즐길 수 있었는데, 1925년 당시의 '기차'는 근대의 속도감과 기술 문명의 가치 매개체였기에 기차역 안에서 서양 음식을 먹는 레스토랑은 장소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로망과도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 실제로 고위 관료와 귀족들이 찾았고, 해방 뒤에는 전 대통령과 1급 배우들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는 꿈의 장소로 등장한다고 한다. -
이번 전시에서도 가장 하이라이트로 삼은 공간이 이곳이 아닐까 싶다.
'근대의 맛'이라는 테마로 프릳츠커피, 메뉴펙트, 펠트 등 요즘 '핫한'카페들이 각자 나름대로 근대를 주제로 해석한 새로운 커피로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내부 인테리어와 더불어 야자수와 잔잔한 음악, 커피 향기까지 마치 1920년대 그 어디쯤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승객들이 각자의 열차를 기다리던, 등받이 가 높은 대형 대합실 의자는 커피 바를 중심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둘러앉아 같은 커피를 기다리는 의자가 된다. 붉은 카펫 위에 한배를 탄 기분으로 서로가 한때의 같은 맛을 기억하기 위하여.
<커피사회 中>
오래된 건물의 색감, 전시 컨셉에 따라 - 공간을 모티브 삼아 - 연출된 가구, 그에 깃든 빛과 그림자.
그런 아름다움 들을 조금이나마 전하고 싶다.
부디 직접 찾아가 느껴보기를 바라며 이미지만을 남겨보려 한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호기심, 향수, 인증샷.
나이대도 다양했다.
왜인지 창밖을 아련하게 바라보시던 할아버지, 흘러나오는 음악과 앞에 놓인 커피-책에 푹 빠져계시던 아저씨, 삼삼오오 모여 추억거리를 꺼내시던 할머님들, 커피콩을 밟으며 까르르 웃던 아주머니들, 그리고 아주아주 열심히 사진 찍는 젊은이들까지.
제각각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점이 내게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같은 공간을 각자의 느낌과 생각으로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듯, 각기 다른 세대의 조화가 참 귀엽고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 역사와 예술, 그것들을 누리는 사람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자주 찾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글에서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좋은 컨텐츠와 요소들이 너무나 많이 담겨있다.
아직 들려보지 못한 사람들은 전시가 끝나기 전에 시간을 내어 직접 경험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미 전시를 감상했던 사람들에게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의미들을 찾아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의 지나간 과거와 현재의 흐름이 담긴 이 공간을, 보다 깊이 있는 시선으로 느끼고 마음 깊은 곳에 무언가가 남을 수 있기를.
또 이번 기회를 날개삼아, 세대를 아우르며 역전에 깃든 다양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펼쳐 보이는 문화예술 생산의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그 시절 그때처럼 우리는 여전히 많은 공간을 드나들며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고 다양한 꿈을 꾼다. 우리가 드나드는 장소는 모두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러한 장소가 우리를 규정하기도 한다.
<생략>
지금 우리는 어느 곳에서 무엇을 욕망하며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바라거니, 지금 우리가 어디에선가 꾸고 있는 꿈이 '위대한 행동을 하기 위한 전주곡'이기를.
<다방과 카페, 모던보이의 아지트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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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다방과 카페, 모던 보이의 아지트>,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커피와 다방의 사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