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1. 안 로맨틱한 연애
나는 배송비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배송비는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지만, 로맨틱한 사람은 아니다. 다정하지만 로맨틱하지 않은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지? 그건 ‘촉촉하고 달지 않은 카스테라’ 같은 걸까? 카스테라를 촉촉하게 만들려면 설탕을 때려 넣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배송비는 그런 사람이다.
배송비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감사하는지 정말 책 한 권 분량으로도 쓸 수 있다. 하지만 배송비는 아마 나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거라 생각한다. 배송비는 내가 ‘요새 나한테 예쁘다는 말을 한지 오래된 것 같다.’고 하면 그제서야 당황하며 어 뭐… 우리 자기 항상 예뻐서…라고 우물거린 다음 아 예쁘다, 우리 예쁜이…라며 구체적이지도 않고 영혼도 없는 칭찬을 할 뿐이다.
물론 우리의 책의 목적이 서로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소문내고, 우리가 결혼을 한 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이며 서로에게 상대가 얼마나 큰 선물인지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에서 약간이라도 그런 로맨스의 요소를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배송비는 아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글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 속단하긴 이르지만 배송비가 쓰는 글의 요점은 아마 이거겠지.
“제가 결혼을 합니다. 제가!! 무려!!! 결혼을 하다니요!!!!”
어쩌면 배송비는 결혼을 일종의 실험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뭐 나도 약간은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상대방은 왠지 나를 실험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내가 배송비에게 불만이 많으며,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해이다.
혹은 글쓰기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배송비에게 어떤 글을 쓰라, 고 압박을 넣고 있는 걸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도 아니다.
정말로 나는 그가 쓰고 싶은 글을 썼으면 좋겠다. 그러니 나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 배송비가 쓰는 글 속에 내가 없더라도 서운해하거나 실망하면 안된다. 하지만 난 그래도 사랑 이야기 하고 싶으니까 해야겠다.
2. 고백: 나는 말로 때우는 사람입니다.
배송비가 나에게 로맨틱하고 달콤한 말로 내가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반복해서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믿는다. 이건 좀 신기한 일이다. 난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한 건 배송비가 나를 아끼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배송비는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즐겁게 지내길 바란다. 밥을 잘 챙겨먹고 건강하길 바란다. 좀더 편하고 쾌적하게 지내기 위해 필요한 많은 귀찮은 일들을 한다. 나랑 같이 있고 싶어한다. 내가 바보같은 실수를 하거나 자책을 하면 호들갑스럽게 괜찮다고 해준다. 물건을 잃어버리고, 산지 두 달밖에 안된 커피 서버를 깨뜨려도, 3인용 소파 가득 너저분하게 책과 종이를 쿠션과 함께 늘어놓아도, 해야 할 일의 마감을 며칠이나 넘겨 낑낑대고 성질을 부려도 말이다.
이런 것들은 당연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배송비한테 그렇게 못해준다. 사고싶어하는 게 있으면 잠시 망설이고,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해도 배송비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흔쾌히 등을 떠밀어주며 응원해주지는 못할 수 있을 것 같다.
쓰다 보니 정말로 미안해진다. 고작 예쁘다는 말을 안해준걸 가지고 이렇게 투덜대다니 내가 제정신인가 아니 제 양심인가 싶다.
가끔은 배송비는 왜 인생을 쉽게 살지 않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말로 때우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배송비를 보면 그에게 나와 함께하는 것이, 그리고 나의 행복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배송비는 굳이 그걸 말로 하지 않는다. 가끔 내가 “자기한테 내가 정말 중요하구나.”라고 이야기하면 “그러엄” 할 뿐이다. 반면 나는 하루에 고맙다는 말을 다섯 번쯤, 미안하다는 말을 열 번쯤 하는 것 같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배송비가 고마운 일을 많이 하고, 나는 미안할 일을 많이 하는 것이다. 나는 말로 때우는 사람이다.
문득 칭찬하거나 고마워하는 말이 오히려 상대를 구속하고 통제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너의 이런 모습이 좋아.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줘, 라고 강화하는 것. 의도가 어떻든 분명 칭찬에는 그런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칭찬을 줄이고 배송비에게 좀 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내 생각에 우린 나름대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
3. 나 없이도 잘 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감정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사랑에 필수적인 요소이긴 하다. 우리가 사랑을 표현하고 확인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감정을 통해 표현하는 경우도 많지만 부정적인 감정도 만만치 않게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기쁨, 흥분, 달콤함, 즐거움, 설렘이 사랑의 밝은 면이라면 불안, 질투, 서운함, 아쉬움 등이 사랑의 어두운 면일 것이다. 당신을 좋아해요. 함께 있고 싶어요. 잘해주고 싶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이런 말들이 긍정적인 사랑의 표현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긍정적 감정으로는 아무래도 ‘난 네가 필요해’라는 마음을 전달하긴 어렵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떠나면 나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아.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달콤하고 중독적인지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특히 그건 어떤 사람들에게 더 치명적이다. 스스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 나에게 어떤 쓸모가 있어야 상대를 머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자신이 대체 가능한 존재라는 걸 견디기 어려워하고 특별해야만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런 사랑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랑은 파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관계도 건강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운명적이고 유일하며 목숨을 건 로맨스가 과대평가되어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관계가 특별해서라기보다 그냥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서 그런 사랑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부정적인 정서, 특히 불안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 그런 불안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강력한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사람들이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느냐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사실 이게 진짜 문제다).
내가 배송비가 애정 표현을 많이 안한다고 느끼는 건 배송비가 부정적인 정서를 많이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 그렇지 않을까 종종 생각한다. 반면 나는 좀 불안해하는 편이라, 사실은 아직도 가끔은 의심도 하고 걱정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자꾸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데 그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완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어쩌면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다. 파괴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시험해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그런대로 어른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젠 그런 기분은 잠시 머무르다 눈 녹듯 사라지곤 한다. 어떻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믿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어쩌면 그는 나 없이도 잘 살 사람이지만 나를 사랑하고,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4. 누가 더 멀쩡한가?
앞서 설명한 이유들로 나는 왠지 배송비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배송비 주변 사람들은 ‘배송비씨와 결혼하는 행운의 주인공은 누굴까? 부럽다’고 생각할 것 같다. 반면에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속으로 ‘헐. 남편 되실 분은 누굴까? 정말 불쌍하다.’라고 생각할 것 같다(배송비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깔깔 웃어버리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흠.). 배송비는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이다. 여자친구/아내에게 정말 잘해줄 것 같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만한 사람이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나는 뭐, 나에게도 나름의 장점은 있겠지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여자친구/아내에게서 기대하는 특징들을 많이 갖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그래서 별로 인기도 없다. 헌신적이고, 밝고 긍정적이고, 어른들에게 살갑게 대할 수 있고, 아이를 예뻐하며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고, 경제적인 능력이 적당히(과도하면 안된다) 있고 알뜰하며 생활력이 강하고 그런 것들. 쓰다 보니 정말로 나와 거리가 먼 사람인 것 같다.
배송비는 왜 나를 좋아할까. 평소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나를 좋아하는 것 같긴 하다. 그리고 평소에 하는 말이나 쓰는 글로 미루어 보아 다른 사람들이 여자친구로서 매력적이라고 느끼지 않는 특성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잡다하게 아는 게 많다거나, 생각이 많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남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배송비는 남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평범하고, 배송비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그의 어디가 잘못된걸까? 나로서는 무척 감사한 일이지만.
어쩌면 이런 것들은 다 내 생각일 뿐이고, 사실 남들이 보기에는 우리 둘 다 비슷한 종류의 인간들이고, 비슷한 방식으로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러나 저러나,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