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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bambi Jun 06. 2018

어쩌면 오래된 이상형

결혼에 대한 예전과 지금의 생각

1

돌이켜보면 꽤 오래 전부터 결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유는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그냥 다시 혼자가 되고, 내가 과연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의심하고, 불확실성을 견뎌야 한다는 게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조금 비관적인 편이라, 세상에 결혼을 해도 될만한 남자의 비율이 극히 낮다고 믿었고,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 중 괜찮은 남자의 비율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예전에는 또 빨리 결혼하는 남자들이 결혼하기에 더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했다. 어쨌든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 만족스러운 결혼을 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늦게까지 결혼을 안한 사람들 중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을 별로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겠지, 하는 단순한 추론에서 나온 생각이다. 지금은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결혼하면 같이 살 수 있고 그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으니까, 라는 생각에 결혼을 하고 싶었던 적은 안타깝게도 없는 것 같다. 결혼을 하면 어떻게 살 수 있다는 것보다, 일단 하면 더 이상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더 끌렸다. 

어쨌든 결혼에 대해 ‘언젠가는 해야 할 것, 기회는 한 번 뿐’이라는 암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연애에서 결혼의 가능성과 적합성을 진작부터 점쳐보곤 했다. (쓰다보니 정말 부끄럽다. 대체 결혼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집착했단 말인가.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당연히 상대는 대부분 나와의 결혼에 대한 생각이 1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어처구니 없는 나이에, 사귄 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아서 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상대가 그럴 생각이 없는 걸 확인하면 그때부터 연애가 의미없이 느껴지고, 결국 헤어지게 되곤 했다. 



2

그렇다고 내가 막 사귀는 남자마다 붙잡고 결혼하자고 조르고 질려서 떠나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내 말은, 그렇게 곱게 미친 사람이 아니라 더 미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랑 좋긴 한데 내내 연애하고 결혼해서 평생 볼 생각을 하니 어쩐지 자신이 없어서 헤어진 적도 있고, 지금 이 사람이랑 사귀면 왠지 결혼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썸을 타다 말기도 하고 그랬다. 그렇게 안정과 정착을 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원하지 않는 마음도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꽤나 자주 연애에 대해 회의를 느끼곤 했다. 종종 연애를 할 때의 나는 연애를 하지 않을 때의 나보다 훨씬 덜 멋진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연애를 할 때의 나는 나답지 못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멋지다는 것의 기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일관적이다. 성장하는 것 그리고 생산적인 것. 

청소년기 그리고 초기 성인기 연애에서 내가 좋아했던 점은 연애를 하면 내가 보통 여자 아이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내가 유별나다거나 이상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특히 스스로 여자라고 느끼거나, 남자들이 나를 이성으로 본다고 느끼기 어려웠다. 지금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추측하건대 예쁘지 않아서, 공부를 너무 잘해서, 주변에 관심이 없어 보여서,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중학교 때는 항상 책상에 엎어져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이상한 음악들을 듣는 애였다. 아이들은 나를 괴물이라고 불렀는데, 어떤 남자애는 내가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외모 때문이 아니라 공부를 너무 잘해서 그렇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는 아무튼 나름대로 힘든 시기였는데, 얼굴을 포함한 몸 전체에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거울을 보기 괴로울 때가 많았고, 고전 소설의 박씨 부인과 나를 동일시하며 언젠가 이 피부의 울긋불긋한 병변이 씻은 듯이 사라지지 않을까 상상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여자애들도 그렇지만 남자애들은 특히 나를 자기들과 뭔가 다른 종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나에게 관심이 없지는 않았는데, 나보다는 내가 적은 답이나 내가 받은 점수에 대한 관심이었고, 그밖에는 그냥 자습시간에 잠을 얼마나 자는가, 공부를 어떻게 하는가, 노트에 뭘 그렇게 열심히 써대는가 그런 거였다. 

그렇다고 내가 남자애들한테 관심이 없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캐릭터 상 ‘또래 남자애들은 시시하고 유치해서 어울리기 싫고, 남자 어른들이나 여자 친구들에게 더 관심이 많은’ 그런 사람이었어야 할 것 같은데 거의 항상 좋아하는 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잘해본다거나 사귄다거나 그렇게 해볼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예뻐진다거나 남자애들한테 잘 보이는 건 내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시대가 많이 변해서 요즘 같으면 완전 찐따 취급을 받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뭐 다행인지 불행인지 찐따는 맞긴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나름 괜찮았다.  




3

대학교에 가니 이제 성적 같은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졌고, 연애라는 게 잘 나가는 소수가 아니라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그러면서 나한테도 연애의 기회가 많이 생겼다. 청소년 시절을 그렇게 남자도 여자도 아닌 상태로 살았던 게 나한테는 나름대로 스트레스였고 사랑받을 수 없을까봐 불안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나를 이성으로 좋아한다는 데서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내가 연애 관계 안에서 보통 여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고 난 대부분의 남자애들이 기대하는 것보다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나는 성장하고 발전하고 싶은데,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원하는 방향의 성장을 그렇게 반기지는 않았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넓은 세상을 보고 그런 것들. 대부분 그런 것에 관심이 없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둔해도, 상대가, 그리고 이 세상이 똑똑한 여자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모르기 어렵다. 키 큰 여자분들이 구두 굽 높이에 신경쓰듯 나도 나의 지식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 흥미 같은 것들이 상대를 위협하지 않게 신경썼던 것 같다. 

연애를 하면서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던 건 꼭 남자들이 내가 발전하는 걸 싫어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냥 물리적으로 그럴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도 크다. 타협적이고, 비생산적이고, 서로에게 썩 만족스럽지 않은 채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누적된다. 연애를 하지 않을 때는 외로움을 동력으로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음악과 책들을 찾고, 일기라도 한 줄 더 쓰는데 연애할 때는 이상하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정체된 느낌을 견디기 힘들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아 얘랑 결혼이라도 할건가’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 질문을 나에게 또 상대에게 해보고, 대답이 '아니'라면, 끝. 



4

지금 와서 이렇게 모든 연애를 폄하하는 건 비겁하고 치사한 처사이다. 사실 나는 연애를 통해, 그 모든 무의미하게 느껴지지만 빛나는 시간들을 통해 인간적으로 성숙하기는 했다.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하고, 인간관계를 생산성이라든가 효율성이라든가 그런 척도로 관계를 평가하는 건 너무 뭐랄까 '후기 자본주의적인 성과사회'의 시각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좀 그런 별로인 인간이다. 내 안에는 평범해지고 싶은 욕망만큼이나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도 많이 있다. 보통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찾아오는, 내가 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잃어가는 느낌. 연애가 끝나고 돌아보면, 그동안 소홀히 하던 여자 친구들은 그 사이에 자신에게 충실하고 매력적이고 멋진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고, 오래갈 친구들과 끈끈한 유대를 형성한 것 같고. 그래서 당분간은 연애 따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또 외롭고, 불안하고, ‘어딘가에 있을 나의 짝’을 찾아서 빨리 정착하고 싶고. 그리고 난 너무 쉽게 누군가에게 반하고 빠지는 멍청한 인간이고... 의 반복. 

그러다가 어느 순간 결혼이라는 제도는 아무래도 모든 사람에게 맞는 건 아닌 듯한데, 나는 굳이 따지자면 결혼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혼자 사는 게 낫겠다. 난 누군가와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에는 혼자 있는 것, 나로서 사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이런 나와 잘 지낼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뭔가 새로운 걸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는 조금 고독한 상태가 어울린다는 생각도. 




5

이번엔 좀 다를까? 다르니까 아마 결혼을 하려고 하는 거겠지. 사실 배송비를 그렇게 오래 만난 것은 아니라서 아직도 가끔 내가 그저 연애 중 찾아오는 ‘결혼하고 싶어! 이번엔 결혼해야지!’ 단계의 상태에 있을 뿐이고, 마침 배송비도 나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결혼을 하려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다르다. 

일단 배송비랑 같이 있는 게 힘들지 않다. 혼자 지낼 때보다 더 좋다. 나는 가족도 불편해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남이랑 살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배송비랑은 잘 지낸다. 배송비가 직장에 다니니까, 떨어져 있는 시간도 많이 있으니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다가 며칠씩 하루종일 붙어있게 될 때면 그것도 좋다. 뭐 한발 양보해서 한참 좋을 때니까 그럴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편인데 그 덕분인 것 같기도 하다. 이것도 사랑의 힘이고 사랑이 식으면 꼴보기 싫어지거나 서로 바라는 게 많아지거나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그런데 지금은 몹시 낙관적이고 혹시 힘든 시기가 찾아오더라도 좋은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이 있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배송비는 정말 드물게도 내가 성장하고 싶은 욕구를 저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진심으로 내가 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는 사람도 드물지만,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더 드물고 귀하다고 생각한다. 배송비는 그런 사람이다. 배송비는 내가 더 똑똑하고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에 위협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좋아한다. 내가 재미있고 새롭고 아름다운 걸 만들어낸다면 배송비가 무척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라는 걸 알고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관계이다. 아마 이런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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