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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금 May 28. 2022

카이로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Giza, Egypt


편안하고 즐거웠던 여행지보다 고생스러웠던 여행지가 기억에 더 오래 남고 이야깃거리도 많다는 건 여행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카이로 여행이 어땠느냐고 누군가 내게 물으면 나는 일단 '후..' 긴 한숨부터 한 번 쉬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대환장 파티, 혼돈의 카오스였노라고.




카이로에서 멀지 않은 곳 기자에 위치한 피라미드를 보러 나섰는데, 타고 가던 버스가 접촉사고를 당해서 시비가 붙었고 더 달릴 생각이 없어 보여 중간에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다. 피라미드에 도착하니 이미 체력 고갈. 더위와 불쾌함에 지쳐서 피라미드 내부를 둘러볼 의지가 꺾여버렸다. 멘탈을 챙기기 위해 뭐라도 먹으면서 피라미드를 바라보는 편이 낫겠다 결정하고 기자 피라미드 근처 피자헛에 들어갔다. (카이로에서는 현지 음식에 도전하기보다 안전한 패스트푸드를 더 자주 먹었었다.)


피자헛 창가에서 감상한 피라미드


당시 썼던 일기의 일부를 옮겨본다.


2009/09/26 토 맑음

이집트에 무사 도착하다! 택시 타는 순간부터, 아니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혼잡하고 정신없는 카이로의 포스를 느꼈다. 엄청 무질서한데 그 모습이 또 재밌기도 하다. 길을 걷거나 지하철을 탔을 때 느껴지는 시선이란!! 그런데 그것도 어쩐지 우스웠다. 남자애들이 나를  보면서 뭐라고 떠드는 게 느껴지면 화도 났지만..

2009/09/27 일 맑음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엄청난 경적소리와 매연.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티슈를 얼굴에 대고 있다. 티슈를 파는 노점상도 많고..

2009/09/28 월 맑음
old cairo에 왔다. 이제야 내가 보고 싶었던걸 보는 느낌이다.
나일강을 이집트에 온 지 3일째가 되어서야 제대로 바라보고 있다.
이집트에 온 것이 실감 난다. 마음도 훨씬 가뿐하다. 골목을 걷다가 사진을 찍는데 한 소년이 내 사진을 찍어주겠단다.
'혹시 돈 달라고 하는 거 아냐?'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하도 당해서..) 반신반의하며 카메라를 건네줬는데 제법 잘 찍어줬다. 그래도 내 표정이 아이들 앞에선 편안해진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래도 순수하고 좋은 이집션들을 만났다. 가방 열렸다고 말해준 아저씨, 돈 주워준 아주머니, 메트로패스 주워준 아주머니.. 혼자 다니면 귀찮으리만치 눈빛을 쏘고 말 거는 사람들.. 달려와서 '헬로' 한마디 하고는 까르르 웃는 아이들.. 그래~ 좋은 것만 기억하자! 나일강이 내 눈앞에서 흐르고 있잖아.. 다짜고짜 자기들 사진을 찍어달라던 아저씨들 너무 웃겼다. ㅋㅋ 오늘에서야 카이로가 조금 마음에 든다.



피라미드 입장이 끝난 시간이었지만 날은 아직 밝았고, 그냥 돌아서기엔 아쉬운 마음에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 말을 타고 둘러보지 않겠냐며 접근한 사기꾼에게 (지금의 나라면 절대 안 당했을 텐데.) 설득당해 말을 탔다. 거기서부터 불쾌함의 극치를 경험했다. 자기는 자식도 있고 와이프도 있다며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안심시키고 말을 태우더니 성추행을 시도했다. 외진 데서 쥐도 새도 모르게 끔찍한 일을 당할까 봐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쓰며 상황을 모면했고, (물리적 힘이 약한 것이 한이다..) 다행히 상대도 악랄한 인간이 아니었던 게 천운이었다. 내가 거절하자 더 들러붙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기자 피라미드 관광은 시원하게 망했다.



2009. 09.

Cairo, Egy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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