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런 그로프의 <플로리다>와 봄의 바다
솜씨를 부린 글보다 단순하고 정확한 글을 쓰고 싶다. 분수보다 빗방울 같은 글. 내면을 억지로 퍼올리지 않고 빗물 받듯 떨어뜨리고 싶다. 무심하게, 하지만 사유와 문장을 편협하고 거칠게만 끌고 가면 안 되겠지. 어느 부분에서 힘을 뺀다면, 다른 부분에선 차곡차곡 공들여 쌓아 올려야만 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차를 타고 바다를 보고 왔다. 물이 많은 곳에 가면 기분이 좋다. 물이 많은 곳은 대부분 탁 트여 있고, 햇빛을 보기 좋다. 주위는 고요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없이 물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다. 봄바다는 어딘지 쇠락한 느낌이다. 카페 옆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도 색이 바래 있었다. 누군가 버리고 간 해변용 장난감처럼. 차를 시키고 널찍한 카페 옥상에 올라가 로런 그로프의 <플로리다>를 읽었다. 첫 단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직 두 편밖에 안 읽었지만...) 힘이 있다. 연민이나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정확하게 본다.
지난봄 백조들이 새끼 넷을 낳았는데, 솜털로 뒤덮여 삑삑 울어대는 그 사랑스러운 것들은 어린 아들들의 기쁨이었다. 아들들은 매일 그것들에게 먹이를 던져주었는데, 어느 아침 백조들이 우리가 던져준 먹이에 정신이 팔렸을 때 새끼 하나가 캑 목멘 소리를 내고 몇 차례 자맥질을 하더니 수면 아래로 쑥 내려갔다. 새끼는 다시 나타났지만, 연못 반대쪽에서, 수달의 발에 붙잡힌 채였다.
수달은 등을 물 쪽으로 하고 조용히 떠서 그것을 조금씩 씹어먹었다. 수달이 새끼 백조 한 마리를 더 먹고 난 다음에야 야생동물 보호팀이 도착해 남은 두 마리를 건져냈지만, 나중에 지역 소식지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새끼들의 작은 심장이 겁을 먹어 멎어버렸다고 했다. 부모 백조들은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몇 달을 떠다녔다. 아마도 이것은 투사일 것이다. 검은 백조이자 부모인 그것들은, 깃털이 이미 상중의 색깔이다.
(유령과 공허, 19쪽)
수달은 등을 물 쪽으로 하고 조용히 떠서 그것을 조금씩 씹어먹었다. 이 문장 미쳤고, 아마도 이것은 투사일 것이다. 이 문장이 마음에 오래 걸려 있었다. 25쪽에서 다시 백조의 이야기가 나온다. 수녀원의 늙은 수녀들이 떠나고 새로 온 교수가 수녀원 건물 앞 오크나무에 업라이트 조명을 달아놓았는데 그 나무는 아주 거대해서 ‘아래를 향해 자라다가 땅을 짚고 다시 위로 자랐다. 그 모양새가 팔꿈치를 땅에 댄 팔 같’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소설 속 나는 ‘그 아름다움에 놀라 넋을 놓고 서서, 밤중에 백조들이 저들의 섬에서 반짝거리는 그 빛을 바라보는 것을, 저들의 가슴이 감동하는 것을 상상한다. 백조들이 다시 둥지를 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경험하고서 어떻게 그 상실을 견디는지 나는 모르겠다’고 적혀 있다.
바다 반대편에는 야산이 있어서 책을 읽다 물과 숲을 번갈아 보았다. 군데군데 이팝나무가 보였다. 나는 이번 계절에 이팝나무를 처음 알았다. 매년 늦봄과 초여름에 보이던 흰 꽃나무가 뭔지 궁금해하기만 했다. 지난겨울에 제주도에서 붉은 열매가 가득 피던 가로수도 여행 내내 볼 때마다 저것 좀 봐, 하면서 너무 예뻐하기만 했다. 느끼는 건 쉽게 한다. 그 이후로 나아가는 건 힘이 드니까. 감각하는 것 이상의 상위의 것들을 능숙하게 하고 싶다. 이름을 알면 길이 들고 친숙해질까. 내면과 마음에 골똘하는 것만큼 세계와 실감에 대해서도 잦게 생각한다. 제주도에서 본 나무 이름은 먼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