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HE WIFE> 2017년
굳이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인생은 본질적으로 비극이다. 죽음으로 귀결되는 생이 비극이 아닐 도리가 없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의 자식과 부모가 되는 삶의 여정은 순간적인 희열과 행복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다. 우리가 불행한 건, 생의 근간이 되는 가정(가족)을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는 데서 비롯된 게 아니라, 어떤 선택을 해도 근본적으로 비극을 피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한 가족의 행복과 불행은 세월에 삭아 퍼석해진 비밀에서 비롯된다. 남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은 작가의 아내 조안 캐슬먼(클렌 클로즈 Glenn Close)의 표정은 복잡 미묘하다. 남편 조셉(조나단 프라이스 Jonathan Pryce) 앞에서 스스럼없이 기뻐하(는 척 하)면서도 석연치 않은 속내는 화면을 떠나지 않는다. 킹 메이커를 자처하며 남편을 문학계 거장으로 만든 '내조의 여왕'은 혼란과 분노를 애써 자제하지만, 시시각각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멈추지 않는다.
문학적 재능이 일천한 남편을 성공시키기 위해 아내는 기꺼이 대필을 한다. 남편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여자가 작가로 성공하기 힘든 현실에 타협한 것이다. 그 와중에 남편은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고, 아내는 타협과 인내를 적절히 섞어가며 가정을 지킨다. 장성한 아들은 작가를 꿈꾸지만 거장이 된 아버지의 평가는 냉랭하다. 조셉은 노벨상을 수상하며 아내의 노고와 희생에 대한 찬사를 그럴듯하게 늘어놓는다. 남편의 수상 소감을 들으며 조안은 참담한 심정을 삭이다 못해 분노한다. 조셉이 지껄이는 감사는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영광을 누릴 사람은 제 아내 조안입니다. 조안은 제 평생의 반려자입니다.
그녀가 있었기에 안정을 찾았고,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제 작품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죠. 아내는 제 정신이자, 제 의식이며, 제가 느끼는 영감의 원천입니다. 조안, 당신은 내 뮤즈이고 사랑이며 내 영혼이오.
이 영광을 그대와 나누고 싶소.
이런 치사는 그녀가 그의 작품을 지은 진짜 작가라는 진실을 은폐하며, 그저 거장의 뒷바라지를 잘 한 아내를 치장하는 미사여구로 작용한다. '매 작품마다 소설의 형식에 도전하고, 스토리텔링과 문체의 새로운 지평을 연 진정한 거장'은 조셉이 아니라 조안이었다. 양심의 가책이나 미안함은커녕, 오만하고 기세 등등한 남편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조안은 헤어질 결심을 한다.
평범하지 않은 듯 보이는 작가 부부의 인생은 의외로 빈번하고 통속적인 '가정적 클리셰'로 가득하다. 일단 모든 가정에 하나씩 있는, 안방의 침대만큼 흔하고 거대한 비밀이 그렇다. 세상에 비밀 없는 집이 있을까. 능력 있는 아내는 남편의 기를 살리기 위해 오히려 숨어 지낸다. 비겁한 남편은 자격지심 때문에 바람을 피우고, 아내는 이를 묵인하며 참는 걸 가정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 합리화한다. 양심의 가책이나 미안함, 진정한 감사는 가정에서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왜? 이 모든 건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엄마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가사노동을 하는 건 당연하다. 일가를 부양하는 아빠의 수고는 자식들에겐 당위다. 자식들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공식적으로 한 번씩 아내의 희생과 노고를 치하하는 게 화목하고 이상적인 가정의 전형이다. 현실에선 이에 부합하는 가정은 거의 없는데 말이다.
일방적인 희생과 노고가 쌓이면 불만이 터져 미움이 된다. 가정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비밀은 사실은 가족을 붕괴시키는 뇌관이 되기 마련이다. 희생과 사랑은 자발적이기도 하지만, 대게 강요되고 일방적일 때가 많다. 가족이 남보다 못한 원수가 되고, 미움과 원한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가족으로 안 만났으면 그 정도로 미움이 깊지 않을 텐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강요된 그 모든 것이 억압과 분노가 되기 때문이다.
조안은 평생 남편의 작품을 대필했고 그 결과에 분노하지만 끝내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남편을 거장으로 만든 비밀은 그녀의 선택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그녀가 자초한 일이다. 늙어서도 멈추지 못하는 조셉의 바람기는 구역질 나지만, 젊은 시절 조안은 그 덕분에 유부남이었던 문학교수를 이혼시켜 결혼할 수 있었다. 자신의 무능과 작가적 양심은 모른 척하며, 아들의 문학적 열망을 혹독하게 평가하는 아버지는 또 어떤가. 만일 그가 오롯이 자신의 실력으로 문학적 성취를 한 작가라면 아들에게 그렇게 가혹했을까 싶다. 그가 평생 아내 손끝에서 은폐시킨 진실이 그를 더 파렴치하고 가혹한 거장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거장의 비밀을 감지한 기자 나다니엘(크리스천 슬레이터 Christian Slater)의 예리한 질문에 조안은 날카롭게 반응한다. 그녀는 아마 진실을 폭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평생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뻔뻔한 남편의 민낯을, 그 늙고 추한 진실을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함구한다. 그의 비밀은 곧 그녀의 비밀이고, 그들이 안락한 가정과 문학적 성취를 위해 공모한 죄는 그들 공동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어쩌지 못한 그녀의 마지막 분노는 남편의 심장을 멎게 하고, 조셉은 끝내 노벨상 수상 작가로 영면한다. 조안은 아마 남편의 영예를 지키기 위해, 분노보다 강한 자존심으로 마지막까지 함구하다 생을 마감할 것이다.
진실보다 강하고 무서운 안락과 평화가 있다면, 그것이 있는 곳은 아마 가정일 것이다. 당장 각자의 가족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사랑과 존경과 감사 뒤에 은밀히 숨겨놓은, 때론 나 자신보다 부끄럽고 파렴치한 그들의 실체를 조용히 삭이며 사는 게 우리의 일상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