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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루 Mar 27. 2018

따뜻한 노을과, 저녁. 그리고 영하 30도

콧 속이 얼어버리는 온도에서 알혼의 노을을 만났다

이르쿠츠크에서 알혼섬 숙소로 오는 시간을 한국식으로 계산하면 4시간이면 충분하다. 나머지 시간은 뭐냐고? 기다림의 시간이다. 내가 아닌 내 일행을 기다리는 시간, 나와 도시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나온 사람들을 기다리는 시간. 오전 9시에 출발해여 오후 한두시쯤 알혼섬 숙소에 도착하리라는 기대는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현지 사람들이 6시간 걸린다고 하는 것에는 '기다림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음을 꼭 적어두어야겠다.


드디어

알혼섬 끄트머리에서 또다시 미니버스를 타고 숙소가 몰려있는 후지르 마을까지 오는데에는 한시간 남짓 시간이 걸렸어. 꽤 평평한 곳을 지나 상대적으로 덜 울퉁불퉁거리는 길을 지났지. 창밖으로는 끝없는 평야가 보이기도 했고 저 멀리 눈 쌓인 바이칼 호스가 보이는 듯도 했어. 일단 운전을 시작한 러시아 아저씨는 거침없었어. 앞으로 쭉쭉 나아갔지. 차량 안에는 여전히 자리가 불편했지만 기약없는 기다림보다는 엉덩이가 아픈 것이 훨씬 나았어. 사람들이 살 만한 곳에 다다르고 구글 맵을 켜 위치를 확인해보니 드디어 숙소에 다 왔더라고! 나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지. 곧 내릴 수 있어!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있었어. 우리와 함께 탑승한 중국인들이 자기 숙소 이름을 모르고 있었던 거야. 기사 아저씨는 사람들을 태우기 전, 그가 내려줘야 할 승객들이 갈 목적지-숙소이름-를 알고 있었어. 그래서 마을에 도착해 순서대로 내려줄 요량이었지. 분명히 사전에 전달받은 숙소 앞에 정차해, 이곳이 어디라고 말을 했는데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어. 나와 뀨는 정말 답답했지. 어떻게 자기가 예약한 숙소 이름을 모를 수가 있는거지? 그런 이해하지 못할 실랑이는 몇 번 정차할때마다 20분 가량 이어졌어. 우리는 확실하게 대답했거든. "다이아나"라고. 사실 지금도 그들이 어떻게 여행하고 있는지 궁금해. 



 스카챠, 그리고 니나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숙소에 대해서도 꼭 이야기해주고 싶어. 다이아나 호스텔, 그러니까 현지인들은 '디아나'라고 발음하더라. 다이아나, 디아나. 어쨌든 좋았어. 짐을 풀고 몸을 뉘일 잠깐동안의 내집에 도착했으니까. 숙소 오너인 나스티아는 매우 친절한 금발 러시아 여성이었어. 얼굴에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친절하게 알혼섬 지도를 펼쳐놓고 설명을 해 주었지. 그녀가 우리에게 개인적인 호감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했지만 괜찮아. 우린 마주보고 있었고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통해 내일 북부투어를 예약했고 그 다음 나스티아의 딸, 스캬챠를 만났어. 스카챠는 매우 활달한 친구였는데 겉보기엔 초등학교 3-4학년쯤 돼 보이더라. 동물과 노는 솜씨가 매우 대단했어! 처음 스카챠가 데리고 온 녀석은 펠릿이었어. 몸이 길쭉하고 보들보들한 털에 분홍색 코가 인상적이었어. 나스티아는 요 작고 어린 펠릿을 소개하면서, '귀엽지만 냄새나는'녀석이라고 했어. 허락을 받은 뒤 몸을 조금 쓸어보았는데 정말 손에서 구린내가 나더라고! 그 다음은 퀴가 꽤 큰 까만 개, 니나였지. -내가 좋아하는 만화 속 등장인물 이름이기도 해-니나는 1살이 채 안된 어린 개였어. 개 나이 1살이면 사람나이 6살 정도니까 니나와 스카챠는 아주 좋은 친구인 셈이지! 실제로 둘이 아주 재미있게 놀더라고. 스카챠는 니나를 약올리기도 하고, 장난을 받아주기도 했는데 둘은 매우 잘 어울렸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 같았어. 대화가 통하지는 않았지만 니나의 재미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했지. 매우 활달하고 따뜻한 성격의 스카챠 덕분에 이곳을 숙소로 잡은 것이 더욱 행복했지 뭐야.




붉게 타 버릴 것 같은

하루종일 버스안에서, 사람에 치여, 기다림에 지친 하루를 보낸 우리는 상당히 피곤했어. 빨리 밖으로 나가야 알혼 섬의 요모조모를 확인할 수 있을텐데, 모두 쉽게 움직일 수 없었지. 그래도 힘든 몸을 겨우 일으켜 단단히 껴 입은 다음 숙소 밖으로 나온 다음에 우리가 봤던 것은 붉게 타오르는 알혼 섬 하늘이었어. 옹기종기 작은 성냥갑처럼 해안선을 따라 모여있는 곳, 바로 후지르 마을이지. 알혼섬에 오는 동안 하늘은 매우 흐렸고, 눈구름으로 가득했지. 알혼 근처에 다다라서야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꽉 막힌 하늘이 아닌 알혼의 노을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어. 이 장면을 보려고 오늘 그렇게 하루종일 고생했던 것일까. 하늘은 대부분 회색빛이었고, 주홍빛과 노란빛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지만 먼 길을 내달려 온 우리에겐 '노을' 이상의 것이 보였어. 저 붉은 빛에 오늘 우리의 하루가, 러시아에서의 하루가, 이르쿠츠크에서의 하루가, 알혼섬의 하루가 담긴 것이였어. 


하늘이 더욱더 어두워지고 주홍빛이 어슴푸레 달빛으로 젖어들어갈때까지 우리는 하늘을 보고 또 보았어. 빛이 사라져 가는 쪽으로 내달려 갔지. 눈이 무릎까지 쌓여서 푹푹 패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야. 바닥은 눈이 쌓이고 쌓여 마치 나무판처럼 견고하게 얼어 있었어. 밟을 때마다 쩌적, 하고 갈라지면서 허공에 붕 떴던 내 발을 깊숙한 지면으로 끌고 내려가더라. 알혼 섬의 첫인상은 그 눈과 같았어.


마을을 지날 때, 우리는 몇 마리의 개를 보았어.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길 개?' 그러니까 주인없이 떠돌아다니는 알혼섬의 개인 것 같았어. 이녀석들은 우리 주위를 맴돌며 뭔가를 원했는데, 바로 먹을 것이었지. 우리는 눈치도 없이 개가 우리를 반긴다고 생각하면서 함께 뛰어 놀았어. 우리가 정말 답답했을 거야. 갖은 아양과 애교를 떨면서 반겨주었더니 먹을 것을 주지도 않고 그냥 뒹굴며 놀았으니 말이야. 나중에 알았어. 알혼 섬 내 마트에서 개 밥을 따로 팔고 있는 것을 보았거든. 미리 알았다면 한 봉다리 사서 알혼 섬 길개들의 배를 조금이라도 채워 주었을 텐데.




따뜻한 저녁

영하 28도는 장난이 아니었어. 옷과 패딩을 입은 몸은 괜찮은데, 말단 부위가 문제였지. 손가락와 얼굴, 볼, 발가락이 너무 시려웠어. 다른 부위는 괜찮았어. 일단 숙소에서 나스티아가 소개해 준 몇 개 음식점을 지도에 표시해 두었어. 맛집, 비싼집,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집. 하지만 거의 대부분 식당이 문을 닫았더라. 나스티아가 소개해 준 집을 제대로 찾아간것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어.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추웠고, 불이 켜진 곳이라면 일단 문을 열어제쳤지. 따뜻한 공기가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였어.
내부에 들어가니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두 명 여성이 식사를 막 마치고 있더라. 우리는 그들이 먹었던 음식을 살짝 힐끗거렸어. 메뉴를 보았지만 온통 키릴어였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글자가 거의 없었거든. 그들도 우리를 살짝 쳐다보는 듯 했어. 그래서 용기를 냈지.
"안녕하세요, 저희가 저녁을 먹으러 왔는데, 읽을 줄 아는 글자가 없어요. 뭘 드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다행히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어.
"그러면 몇 개 알려드릴게요, 우리가 먹은 메뉴는 이거, 이거, 이거에요."
그녀들은 매우 친절하게 자신들이 먹은 음식을 설명해주기 시작했어. 그들이 시킨 메뉴는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 맛이 괜찮았고, 이것은 너무 짜서 먹을 수 없으니 시키지 말라는 조언도 해주었지. 모두 지쳐 있었고 힘들었지만 그 상황에서 이렇게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참 기뻤어. 그녀들의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함께 사진으로 남긴 이 순간만큼은 오래오래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


따뜻한 이 음식 이름은 '보르쉬'. 러시아 여행을 하는 사람에게 추천할 현지 음식이야. 비트뿌리가 기본이 되는 붉은색 수프인데 러시아 현지 음식이라고 러시아인은 그러지만, 우크라이나사람들은 자신들이 원조라고 하더라. 아쨌든 종류가 매우 많아. 내가 먹은 보르쉬는 토마토색과 맛이 더 많이 느껴지는 따뜻하고 맑은 음식이었어. 나중에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맛보았던 보르쉬는 좀 더 붉고 자줏빛이 나는 걸쭉한 것이어서 확실히 요리사마다 굉장히 다른 조리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하루종일 이리저리 채여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던 우리에게 따뜻한 보르쉬는 큰 힘이 되어 주었어. 불평하고 싶은 것도, 험담하고 싶은 것도 많은 하루였지만 모두 잊고 노곤노곤해졌다고. 여행 중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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