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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루 Mar 20. 2018

열차에서, 그리다.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사람들.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달리는 동안 매일 아침 나를 반기는 것은 하얀 자작나무 숲이었다. 열차에서 만난 '일리야(이후 등장 예정)'는 그것을 러시아말로 '비료자'라고 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나무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동안 창밖을 보는 것도, 내가 타고 있는 열차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도 모두 즐거운 시간이었다. 눈이 마주쳐 미소를 짓고,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 친해질수 있다는 것은 여기가 시베리아 횡단열차 내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언어가 통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새로운 손님

열차가 멈추고, 디모페이와 러시아 친구가 듬직하게 지키던 자리에는 멋진 러시아 여성 손님들이 자리를 메웠다.  오랜만에 내 자리 윗층, 그러니까 2층에 새로운 손님이 왔다. 우즈벡에서 온 샤쉐와 휘디에였다. 인사의 의미로 코리아 디저트, 약과를 건넸다. 건너편 두 명 여성손님에게도 나누어 주었더니 작은 머핀이 답례로 돌아온다. 아주 흐뭇한 순간이다.






샤쉐와 휘디에

러시아 여행을 마치고 우즈벡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한 두 명은 매우 수줍었고 그래서 귀여웠다. 몽골리안과 비슷한 외모의 샤쉐는 앳된 모습으로 내 자리 끝쪽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중이었다. 친구 휘디에는 좀 더 아랍인 같이 선이 굵은 외모였다. 턱수염을 멋있게 다듬고 부리부리하지만 밝은 미소로 인사를 했다. 언어. 우리는 조금 어색하지만 서로에 대한 호의를 표정으로 표현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충분히 반가움을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두 명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3G가 터질때만 작동하는 구글 음성 번역기가 있다! 내 일행 중 한명이 그들의 나이를 물었다. 겨우겨우 의사소통에 성공해 샤쉐가 휴대폰을 꺼내 숫자를 적기 시작한다. 그런데 적고 있는 숫자가..? '19...' 으응? 19살이라고??  우리는 모두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다행히(?) 나이가 아닌 태어난 연도였다. 샤쉐는 1997년생, 휘디에는 1996년생이라 했다. 이어 샤쉐는 내 나이를 어림짐작하기 시작했다. 



1996

사쉐의 휴대폰에 적힌 숫자였다. 이게 내 나이라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무리 대충 알아맞추기라지만 너무 어리게 본 것이 아닌지? 이렇게 쌩얼로 바로 옆에 있는데? 이성적인 생각과는 달리 기분은 아주 좋았다! "Thank you! Thank you!"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고맙다고 표현할 뿐이다. 뀨는 나를 보고 마구 웃어댔다. 난 사기꾼이 아니야. 그저 고맙다고 했을 뿐인걸? 



너희를 그리다


누군가가 나를 그려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바로 호감의 의미다. 특별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나는 한때 그림쟁이였던 과거를 되짚어 이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는 다소 어색했다. 당연하다. 아무 말 없이 마주 보고 앉아있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샤쉐가 2층에 올라가 짐정리를 하는 동안, 휘디에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머리에 짙은 눈썹과 단정하게 정리한 턱수염이 특징적인 휘디에의 얼굴을 개구지게 그려냈다. 처음보는 사람이 자기 얼굴을 그린다니, 다소 굳었던 얼굴이 내 그림을 보자 환하게 변한다. 
"샤쉐, 샤쉐, 이리 좀 나와 봐.  이거 좀 봐. 나를 그렸어."
러시아어를 몰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마법의 순간. 샤쉐가 몸을 일으켜 뭔데뭔데? 하며 1층으로 내려온다. 뒤이어 샤쉐의 얼굴도 그려서 선물했더니 둘은 서로의 얼굴과 그림을 비교해보며 신기해 한다. 
"내가 정말 이렇게 생겼어?"
"응. 너의 귀여움을 가득 담아 보았지."
둘은 자지러진다. (이 모든 대화는 번역기로 진행했다.)
"이거 내 번호야. 우즈베키스탄 오면 연락해." 
급기야 샤쉐는 자신의 휴대폰 번호까지 준다. 10살도 넘게 어린 친구의 번호를 받아든 나를 보고 뀨가 특히 많이 웃어댔지만, 괜찮다. 장모님의 나라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잖아!



갓세븐을 좋아하는 그녀

밤새도록 갓세븐 음악을 들으며 가사를 외우던 그녀. 한글을 잘 아는 듯하고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니 공통관심사나 접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이어폰을 꽂고 자기만의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새침해 보여 혹시 인사를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뀨의 격려에 힘입어 조금 망설이다가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예상과는 달리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누군가 내 눈을 보고 웃어주는 것은 최고의 순간이다!). 그리고는 인사를 했다, 한글로!!! "안녕하세요." 나는 뒤로 뒤집어 질 것 처럼 흥분했다!
그녀는 리본체조선수이며 이름은 타냐. 뮤라트카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했다. 내가 잘못들었는지 몇번 물어보다, 확실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실례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진작 말을 걸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아는 한국어도 많았고 영어로도 소통이 가능했다. 갓세븐이 한국에 사니 한국에 한번 와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니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그런 모습도 귀엽다. 오늘 하루 더 열차에서 머문다면 우리 함께 광란의 밤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그녀와는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이후 그녀의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선물한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뀨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야르돕도 잠깐 기록해 두어야 겠다. 뀨는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가락지 매듭을 판매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횡단열차 내에서는 열심히 만들어 사람들에게 선물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야르돕은 뀨에게 자신이 아는 매듭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때, 볼펜 겉을 꾸미는 용도로 만들었던 방식과 비슷했다. 반지모양 뿐 아니라 팔찌형태도 함께 고민하던 뀨에게 도움을 주신 분이라 얼굴그림 선물을 했다. 횡단열차에서 만난 러시아 사람들은 소극적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그들도 좋은 사람이 되어 준다.



바로 전 날 그린 시베리아 횡단열차. 좋은 사람들을 가득 싣고 달려주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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