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사감 선생님
러시아 횡단열차는 각 칸마다 관리자가 있다. 그들은 탑승자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열차에서 지낼 수 있도록 침구에 필요한 시트 제공에서 실내환경 관리, 화장실 관리, 얼어붙은 외부 차량 관리까지 도맡아 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다. 이런저런 역할이 많다보니 다소 굳은 표정인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스트레스가 많은 직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그들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아무래도 하루중 가장 자주 만나게 되는 사람이라는 이유다.
횡단열차를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횡단열차를 타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칸의 사감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바로 차장님이다! 전체 열차를 총괄하는 분은 따로 계시고, 내가 머무는 곳을 관리하는 분이 차장님이다. 마치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 같다.
열차를 타려는 사람은 러시아 현지인과의 다정다감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기대하겠지만, 가장 먼저 열차로 만나게 되는 사람은 열차 입구에서 굳은 얼굴로 내 티켓을 확인하는 그 사람이다. 멋진 제복을 입고 티켓과 여권을 확인하는 눈은 매섭기만 하다. 긴장도 된다. 뭔가 잘못 걸리면 국물도 없을 것 같다.
차장의 임무
온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탑승 티켓을 내미는 순간이라도 긴장해서는 안된다. 자리가 중복되거나 잘못 승차를 시켰다가는 큰 혼란이 빚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위조 티켓이나 예매한 사람이 탑승하는 경우도 허용할 수 없다. 외국인인 경우는 성과 이름을 혼동해 잘못 쓰기도 하지만 여권과 대조해 다른 부분이 이상이 없다면, 보통은 묵과하는 편이다. 그래도 번호 하나하나, 스펠링 하나하나 틀리지 않도록 정확하게 확인하여 맡은 바 임무를 다한다.
내 차량에 승객을 태우는 것은 순전히 나의 권한. 나의 허락하에 탑승한 승객이라면 내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철도에 올라 정신 없을 그들에게 베개, 시트, 이불에 깔 깨끗하고 하얀 시트를 가져다 주는 것도 나의 임무다. 승객은 입구에서 나를 만나지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아무래도 이때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가르쳐줄 여유는 없다. 그것은 받는 자의 역할. 열차 안에서 사용할 컵을 내어 주는 것도 중요한 일과중에 하나다. 승객이 내릴 때를 정확히 체크해 수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 컵이 깨지지는 않았는지, 티스푼이 제대로 들어있는지.
차량 실내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실내에 먼지가 나는 것이 싫고 쓰레기가 있는 것도 싫고, 눈을 밟고 들어와 발자국이 바닥에 찍히는 것도 싫다. 언제나 열심히 청소를 한다. 화장실도 마찬가지다. 락스를 사용해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아놔야 내 칸에 있는 손님들이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나를 봐줘요
차장님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지나다닐 때마다 오래 쳐다보았지만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다. 조금 무서웠다. 굉장히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말을 걸어볼까? 인사를 해볼까 했지만 깔보는 듯이 거절하면 마음의 상처가 대단할 것 같았다! 함부로 말도 못 붙이고 조용히 관찰했더니,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는 활짝 웃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는 웃어주지 않겠지, 곧 시무룩해졌다.
차장님은 열차가 역에 정차할 때마다 서둘러 내려 차량 아랫쪽에 얼어붙은 얼음들과 오물들을 떼어냈다. 저렇게 긴 꼬챙이로 열차를 탕탕.치는 것이다. 차량에는 칸을 관리하는 차장님이 2인 1조인 듯 했는데, 밤새 이것들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낮이나 깊은 새벽을 가리지 않고 열차가 정차하니 돌아가면서 일을 해 낸다.
똥
러시아에 도착한지 4일만에 똥을 쌌다. (내 블로그니까, 변보다는 똥이라는 표현이 좀 더 찰지니 이걸로 선택!)횡단열차에 탑승한 지 3일째다. 화장실에 들러 오랜만에 똥을 쌌다. 오늘 술을 마셨으니 술똥인 셈이다. 아까 나올 것 같아서 화장실에 들러 보니 차장님이 뜨거운 물을 붓고 애쓰고 계셨다. 나올 것 같은데, 또 막혀 있으면 어쩌지. 걱정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괜찮아 보인다. 휴지를 접어 엉덩이 닿는 부분에 올려두고 살짝 앉는다. 오랜만이라 시간이 좀 걸렸다. 시원하다. 체중도 줄어든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다 배출하고 잠시 내려다 보았다. 과연 며칠만에 세상 빛을 본 똥 답다. 굵고 아름답다.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내려가질 않는다!
두꺼운 똥들이 내려가다 구멍을 막았나보다. 똥물과 함께 작은 똥들이 둥둥. 난 당혹스러웠다. 이건 나만 봐야 하는 장면이다. 누군가에게 절대 보여줄 수 없는데! 난 최선을 다해 몇 번 레버를 내렸지만 평소처럼 솨아아악 쿵, 하고 내려가야 하는 레버가 힘없이 털썩, 주저앉는다. 나도 주저앉고 싶다. 그러다 포기하고 화장실을 문을 열자마자, 차장님과 마주쳤다. 차장님의 표정없는 얼굴에 가슴이 덜컹, 한다. 말하지 말고 그냥 자리를 뜰까 하다 어버버, 입을 열었다.
"화장실 고장났어요. 물이 안 내려가요."
낫 워킹,낫 워킹. NOT이라는 표현을 알아들은 것인지 약간 체념한 느낌과 함께 지친 표정이 내 마음을 때린다. 차장님은... 내가 남긴 똥을 확인하러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난 정말 미안했지만 가벼워진 배를 두드리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시간은 새벽 2시. 차장님이 하루를 닫으며 마지막 락스 청소를 하실 시간에 나는 똥이나 싸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꿀잠을 잤다.
발자국을 남겨서 미안해요
열차에 탑승하자 마자 누군가 열심히 바닥을 쓸고 닦았다. 마포에 뜨거운 물을 적셔 바닥에 먼지가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열심히 물걸레질도 했다. 짐이 많이 들어 있는 배낭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두고 있었는데, 차장님이 오셔서 마포로 내 가방을 밀어냈다. '저리치워' 러시아어를 몰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몇 번 그렇게 차장님의 걸레질 공격을 당하고 나서는 고분고분하게 가장을 안쪽으로 밀어두었다. 내가 바닥에 둔 신발도 등산부츠, 실내용 쪼리 두개였는데, 차장님이 오는 낌새가 보이면 서둘러 안쪽으로 신발을 옮겨두고, 발도 허공에 들고 있었다. 모쪼록 편히 들렀다 가세요.
차장님은 리 아저씨와 함께 작은 파티를 벌이고 있을 때에도 열심히 청소를 했다. 물걸레로 리 아저씨 다리를 툭툭쳤고, 보드카 병을 발견할 뻔도 했다. 술기운에 정신이 없던 나는 그때 실수를 했다. 차장님이 열심히 물걸레 질을 해서 바닥을 깨끗하게 해 두었는데, 내가 신발을 신고 자꾸 왔다갔다 한 것이다. 처음에는 화장실을 가러, 두번째는 차가운 공기를 쐬러. 차장님은 몇번이고 내가 지나다닌 길을 쫒아다니며 걸레질을 해 깨끗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내 속은 그게 아니었다. 알면서도 참아지지가 않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또 발자국을... 복도 끝에서도 차장님이 화가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려두고 씩씩대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때는 참 미안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귀여운 모습이었다! 차장님은 내게 와서 러시아어로 뭐라뭐라 화를 냈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녀가 무엇때문에 화가 났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리 아저씨는 예의 그 능글능글한 얼굴로 "괜차나, 괜차나~"하셨지만.
인사도 못하고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내려야 하는 시각은 오후쯤이었다. 차장님을 보며 말을 걸어봐야지, 인사를 해봐야지, 웃어줘야지 했지만 무엇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짐을 챙겨 열차를 떠나는데 차장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속이 후련한 듯한 모습이었다.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인사라도 나누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제 발자국때문에, 제 똥 때문에 힘들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래도 제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답니다. 사람 사는 것은 언제나 이런 것이겠지요? 진심을 밝히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것이겠지요.. 3박4일 동안 저희를 보살펴 주셔서 고마웠어요. 당신 덕분에 편안하고 즐거운 열차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2018년 1월 16일 17칸 승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