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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Jun 24. 2023

독립심이라고 했습니까?

도오옹닙?

2017년에 '나는 그렇게 파리로 왔다'를 쓸 때, 월급을 받을 때마다 꼬박꼬박 실업보험에 돈을 냈었다. 원천징수 항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프랑스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퇴직 후에는 실업수당의 은혜를 받을 새도 없이 바리바리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다니엘을 다시 보기 위해 여행자 신분으로 왔을 때였기 때문에 당시에 낸 실업보험금은 다른 실업인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먼 길을 떠났을 것이다. 아마도.

 1년 안 되는 기간 동안 세금을 냈을 뿐이지만 그 후로는 파리에서 거리 예술에 세금을 쓰거나 세금을 낭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혀를 쯧쯧 차며 '저,, 저,, 내 세금으로 잘,, 하는 짓이다,, 쯧, 쯔,,'라고 말하고 다녔더니 다니엘이 기막혀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시 원천징수 세금을 내게 된 것은 짧게 재취업을 했을 때, 그리고 올해 다시 정규직으로 다른 업무를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세금이란 좋든 싫든 어차피 내야 하는 돈이기 때문에 급여 명세서에 깨알같이 쓰여있는 글씨에 크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이래선 안된다-. 게다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매년 하는 소득 신고를 조금이라도 틀렸을 때 꽤 아픈 꼴을 당할 수 있다는 걸 프랑스에서 지낸 첫해에 주변 사람들을 통해 배운 적이 있어 세금 문제는 (그나마 둘 중에) 전문가인 다니엘을 착취해 가며 처리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잘 살아내는 게 벅차서 실업 보험의 존재를 의식해 본 적이 크게 없었다.

 그렇기에 작년 첫 실업급여 수급의 경험은 매우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하겠다. 계약이 만료되어 그만뒀을 뿐이라 이런 것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지 반신반의하며 Pole emploi(고용센터) 웹사이트에 계정을 만들고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Pole emploi 사무소의 예약을 잡아 방문했다. 당시 막 델프 B2에 합격했을 때라 이제 혼자서 행정을 보러 다닌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있었지만 슬프게도 직원이 말하는 걸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잘못 돌아가는 일이라곤 없이 무사히 직원을 마주하고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다. 대체 뭘 물어보려나, 무료로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많다던데 나도 그런 혜택을 받을 조건이 될까? 등의 생각을 하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어떤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안내해서 작은 회의실로 데려간 (좀 더 멀쩡한) 직원은 내게 사무적으로 이름, 생년월일, 수급 신청 이유, 주소 등만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

 그 '다른 사람'은 처음부터 약간 화가 난 듯 보였다. 나는 Pole emploi가 전기공한테 제빵 기술 교육을 강요하거나 실업교육 수급자 연락처를 민간 업체에 흘린다는 등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이 대목부터 좀 긴장을 했다. 그리고 내 앞의 직원이 내게 정말 쓸모가 하나도 없는 교육을 강권하기 시작했을 때 어떻게 해야 그녀를 입다물게 할 수 있을까 최대한 머리를 짜내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꾸 내 이력서가 너무 구닥다리라서 이걸로는 취업을 할 수 없다고 위기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같은 이력서로 세 번 취업 권유를 받은 이상 그것은 유효한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직원: 이런 이력서로는 취업 못해요. 좀 더 최신 트렌드를 배워서 능력을 업그레이드해야 된다고요.
나: 직전 취업도 이걸로 했고 이걸로 두 번 더 취업 권유받았는데요.. 저 이력서 쓸 줄 알아요.
직원: 아니 그래도 이력서 전문가한테 보여주고 더 배워야 된다고요 프랑스 실정을 모르잖아요 이거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교육 아니에요 매 교육 차시가 꽉꽉 찬다고요 지금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나: 나는 이력서 쓸 줄 아니까 이건 필요 없고 더 수준 높은 프랑스어 실력이 필요해요. 혹시 프랑스어 교육은 지원 안 해주시나요?
직원: 우리 그런 거(프랑스어) 안 해요. 지금 화요일 금요일 2시간씩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비어있다고요. 이거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거고 한번 시작하면 님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기회라고요. 프랑스 실정을 배우라고요.
나: 나는 지금 다음 레벨 프랑스어 자격 따려고 공부하는 중이라 이미 할 줄 아는 것에 시간 더 쓰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남편이 프랑스 사람이고 프랑스에 오래 산 친구들이 있어서 프랑스 실정은 제가 몰라도 물어보면 알 수 있어요 괜찮아요.
직원: 독립적으로 사세요 좀(Soyez autonome) 인생을 좀 님 혼자서 설계하라고요. 뭔 일 있을 때마다 남편한테 친구들한테 빌빌거리고 살 거예요? 그런 의존적인 태도로 뭘 하고 살겠냐고요 독립심을 좀 길러요 제발.
나: (빈정이 상했으나 돈줄을 쥔 자에게 인신공격을 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기 시작함)

 직원이 이때부터 언성을 크게 높이고 혼자 화를 삭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쯤부터 나를 안내한 이 사람의 동료가 다시 와서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 직원은 옆방 칸막이 너머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자꾸 독립심 타령을 하는 소리로 존재감을 어필했다. 언뜻 50대 백인 여성으로 보이는 그녀의 독립심 타령은 나를 심지까지 불타게 했다. 내 인생에 혈혈단신으로 타국에 떨어져 지금만큼 독립적으로 사는 때가 없는데 감히 니 나라에서 니 나라말로 일하면서 심플하게 살아가는 니가 내 독립심을 운운해.. 감히 니가 이민자한테 '진짜' 세상을 안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해..?라는 생각이 하루 종일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튼 이 쓸모도 없는 이력서 교육은 끝까지 거절했고 (내가 알아서 최신 양식인지 뭔지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 쓴 이력서를 너희들에게 보내겠다고 말한 뒤 집에 왔다. 그리고 나는 내 케이스가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였던 기존 사무소가 아닌 지하철로 20분 거리인 다른 사무소로 전출되었다는 이메일을 받고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전화를 걸었지만 첫 면접 이후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답변만 받았다. 다행히 이후로는 따로 방문할 일이 없어 이 변화로 인해 불편을 겪지는 않았다.

 나중에 다니엘도 얘기를 듣고 기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Pole emploi 직원들도 빠듯한 급여를 받으면서 교육 실적을 못 내면 위에서 쪼이는 모양이라 그런 짓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전처럼 프랑스어를 못 하는 상태였으면 예상치 못한 고함소리 속에서 이력서 교육에 동의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했다. 물론 좋은 직원들이 있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이곳 고용 센터 경험이 다 이럴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내 경험이 썩 좋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게 썩 좋은 경험은 아니라 해도 프랑스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문제가 아니다. 한국인 아니라 프랑스인한테도 행정 문제를 처리하다가 걷잡을 수 없이 문제가 꼬여버리면 해결할 길이 요원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 경험이 내 소재는 될 수 있을지언정 큰 문제는 되지 못한다. 결국 나는 6개월을 꽉 채워서 실업급여 혜택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독립적인가? 완전히 그렇다 볼 수 없다. 여전히 다니엘에게 맡기는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그것은 타인의 알바인가? 지난 시간 동안 나는 낯선 곳에서 동동대면서 남의 나라말을 배워 남의 나라 회사에서 먹고사는 단계까지 걸어왔다. 내년은 올해보다 나을 수 있게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거면 됐다.

 글에 쓴 일은 재작년 말에 있었던 일이다. 작년에는 시험공부한다고 나름대로 절박했기 때문에 글을 쓰지 않아서 올해가 되어서야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딴에는 시간이 좀 지나면 고용센터의 그 사람이 좀 다른 눈으로 봐질까? 궁금했는데 1년 반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여전히 밉고 한심하다. 여전히 어디서 마주치면 걸쭉한 인신공격도 질리도록 해주고 싶다. 나는 작년 초여름 정도까지 실업급여를 받다가 올해 재취직을 해서 작년 내내 Pole emploi에서 따로 연락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뜬금없이 올해 초에 처음 듣는 회사 이름을 대며 연락을 재촉하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어 내가 구직한 회사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Pole emploi에서 하청을 받는 건지 아니면 단순 사칭 사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재취업 교육을 실시하는 사기업이었다. 나는 이미 재취업을 해서 님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고 업무 중엔 핸드폰 소지도 못하기 때문에 다시 전화하지 말고 이메일로 달라고 메시지도 남기고 이메일도 보냈지만 이 끈질긴 연락은 일주일 넘게 계속되다가 끊겼다-당연하지만 재취업한 이들은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자꾸만 내가 성실히 임하지 않으면 Pole emploi의 혜택 수급 자격이 정지된다고 부지런히 협박을 했는데 돈도 끊긴지 오래고 따로 받는 교육도 없어 망정이지 아직 실업 급여 받을 때 이런 연락을 받았다면 깜빡 넘어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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