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어려워서 인원감축을 피할 수 없는데 부부사원이 우선 대상자다
결혼식은 강남에서 치러졌다. 예식장의 비용이 예산을 초과할 테지만 경기도와 서울 전역에서 접근하기 편리한 위치라면 강남만한 곳도 없었다. 회사는 경기도에 위치했으나 직원의 절반은 서울 거주자였기에 위치선정에 신경을 썼다. 결혼식은 성대했다. 친척과 지인보다 회사사람들이 식장을 빼곡하게 채웠다. 대표님부터 임원들, 타 부서에 안면만 트고 지내던 사원들도 참석해 주었다. 그만큼 H씨의 결혼식은 회사의 이슈였다. 사례비를 드리고 고용한 주례선생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내 되는 H양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재원으로 회사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으며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부군과 함께 결혼 후에도 회사발전에 함께 힘쓸 것이고....”
H씨는 2000년도에 대학을 졸업하자 중견기업의 기획팀에 취직했다. 입사 후에 사내에서 만난 타 부서의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고 회사 내에서 많은 응원을 받았다. ‘선남선녀 커플에게 언제 국수대접 한 번 받아보나.’ ‘결혼해서 부부로 함께 출퇴근하며 회사에 충성하면 얼마나 더 좋겠냐.’ 높으신 분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씀에 동료사원들까지 거드는 분위기였다. 연애 3년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 팀원들은 결혼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결혼식 준비를 하라며 야근을 빼주기도 하고 일정에 없던 외근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 성대한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부부는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 급하지 않았지만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주변에서 채근을 시작했다. ‘결혼했으면 아기는 언제 안겨 줄 거냐.’ ‘요즘 어린이집 잘 되어있으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아이를 낳아라.’ ‘얼른 키워놓고 일에 집중해야 한다.’ 와 같은 기대와 충고의 목소리를 들어왔다. 2003년에 결혼을 했으니 3년 만인 2006년에 아들을 얻었다. H씨는 3개월 육아휴직 후 회사복귀를 앞두고 아기는 회사 옆 어린이집에 종일보육반에 맡기기로 했다. H씨의 삶에 균열이 시작된 것은 그때 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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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의 집과 경기도 남부의 회사는 편도 한 시간 반 거리. 새벽부터 아기와 함께 출근길에 오르고 퇴근하면 아기를 찾아 세 가족이 함께 퇴근길에 올랐다. 지금과 같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없을 시절 야근은 당연한 사내문화였다. 일이 있든 없든 회사에 남아 함께 저녁을 먹고 잔무를 처리하거나 간단한 술자리가 끝나고서야 진정한 퇴근이라 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퇴근 후 어린이집에 아기를 찾으러 가야했던 H씨는 칼 퇴근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팀 내에 같은 해에 출산한 직원이 있었지만 그는 친정어머니의 도움으로 회사생활에 있어 출산전후 변화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외에는 미혼이거나 아내가 전업주부인 남자사원들이었다. 팀원들은 H씨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팀에서 점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소외였다.
새로 출시되는 제품준비로 팀이 한창 바쁠 시기였다. 며칠 째 H씨의 야근이 이어지고 있을 때 남편역시 야근이 불가피 한 날이었다. 난처해하는 남편에게 팀장과 팀원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H씨가 보면 되잖아. 애는 엄마가 봐야지.’ 당시의 남편은 그런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H씨는 사정을 말하고 팀에서 혼자 야근에 빠졌다. 피치 못 할 경우 아이를 부서로 데리고 와서 야근을 강행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이가 걸음을 걷는 두 돌 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일 년에 두 번 어린이집 방학이 되면 원에서는 긴급보육으로 아이를 맡겨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몇 번의 방학을 보내고 나서야 방학 내내 어린이집에 남겨진 아이는 H씨 아들 혼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종전처럼 긴급보육을 맡길 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이 되도록 덩그러니 혼자 어린이집에 남아 있었을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졌다. 이후로 방학이 되면 최대한 가정보육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럴 때 늘 연차를 쓰는 건 H씨였다. 아이가 유행병에 걸려 가정보육을 해야 하는 경우 연차를 내는 쪽 역시 H씨였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이 출근하고, 같이 근무하고, 같이 퇴근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일은 점차 H씨가 전담하게 되었다. 남편은 자상하고 부지런한 성격으로 육아와 집안일에 적극적인 사람이었지만 사회생활에 있어서만큼은 태도가 달랐다. 거역할 수 없는 룰이 지배하고 그 앞에서는 무력해졌다. 그것을 개선하려고 시도할 수 없는 것은 H씨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조건일 경우 가정 일에는 여자가 더 희생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었고 아이는 아빠보다 엄마가 보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저 살아내기에 바쁜 나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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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하던 회사가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면서 휘청거렸고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었다. 팀별로 인원을 줄이거나 부서이동이 횡행했다. 기획팀에서는 유일하게 칼 퇴근을 하고 자주 휴가를 냈던 H씨가 타겟이 되었던 걸까. 졸지에 기획팀에서 영업팀으로 보직변경이 떨어졌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H씨의 인사이동에 대해 회사는 남편에게 상의를 하고 양해를 구했다는 점에 있다.
“개발팀이던 남편에게 영업팀장이 잠깐 보자고 하더래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네 와이프를 기획팀에서 영업팀으로 데려올까 하는데 괜찮겠냐고 묻더래요. 당황스러웠지만 회사 분위기도 살벌한데 남편이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알았다고 대답했지요. 저는 그 대화가 있고난 후에야 제 인사이동에 대해 통보 받게 되었어요.”
9년간 제품기획을 하던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발로 뛰며 영업을 따오라고 했다. 그것보다 힘든 점은 영업팀의 관례였다. 회사의 출근 규정인 8시 보다 30분 앞당겨 출근해서 회의를 한다고 했다. H씨는 그 시간에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입장을 이야기 했지만 관례를 따르라는 답이 돌아왔다. H씨는 어린이집 원장님께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이를 20분 일찍 등원시킬 수 있었다. 아이를 데려다 주고 회의실에 들어가는 시간은 7씨 45분. 그마저도 회의 중이라 허리를 숙이고 죄인처럼 입장하는 꼴이었다. 어린이집의 근무자 한사람은 한 아이를 위해 출근을 20분 앞당기는 희생을 필요로 했다. H씨는 어린이집과 강경한 팀의 분위기, 새로 적응해야 할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울음을 삼켰다. 버티는 사이 일 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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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을 옮긴 지 1년쯤 되었을 때 영업팀장이 남편을 다시 불렀어요. 회사가 어려워서 인원감축을 피할 수 없는데 부부사원이 우선 대상자다. 둘 중 한 명을 정리한다면 H씨가 그만둬야하지 않겠냐고 했대요. 남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저는 또 다시 남편보다 늦게 저의 퇴직권고를 듣게 됩니다.”
성대한 결혼식이 끝나고 H씨의 잔치도 끝이 났다. 많은 사람의 기대와 축복 속에 시작했지만 그것이 그래프의 정점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혼을 채근하고 출산을 격려했던 그 많은 말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무렇게나 내 뱉어져 그 어떤 책임도 가지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책임은 오로지 선남선녀 커플에게 있었고 부부 중 H씨에게 기울었으며 부부에게 난 아이도 함께 짊어지게 되었다. 성대한 잔치는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