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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May 14. 2021

결혼과 육아로 멈춘 시계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건강하게 벌고 건강하게 소비하고 싶을 뿐이었다

< 아동미술학원 강사채용 공고 >
경력 : 무관
학력 : 무관
근무형태 : 정규직 수습기간 1개월, 아르바이트, 프리랜서
급여 : 시급10,500
근무지역 : 서울 광진구     

 구직사이트를 몇 달 째 전전하다가 겨우 추려낸 공고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전업주부로 지낸지 9년, 경력단절기간이 길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르쳐 본 경험은 없지만 미대를 나왔기에 이 일에 자신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의 하교 후 스케줄을 고려해서 종일 일자리보다 시간조절이 가능한 강사직을 택한 이유도 있다. 9년 전처럼 화려한 경력과 높은 연봉은 기대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서가 아닌 자신만의 소속과 활동이 간절했다. 세상에 나오고 싶었다. 오랜 고민 끝에 이력서를 넣었고 서류를 넣었던 미술학원 세 곳에서 모두 연락이 왔다. 가르치는 일에 경력무관, 학력무관이라니 다소 의아했지만 그것은 면접자리에서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면 될 터였다. 오랜만에 차려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면접자리에 나갔다.


 ** 미술학원은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F씨의 상황을 배려해 주는 듯 했다. 늦은 오후부터 저녁시간대에 근무가 불가능하다는 F씨에게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 대신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이 많이 빠진 상태라 당장은 수업이 잡히지 않을 거예요. 그동안 출근해서 수업연구를 하시고 아이디어회의와 교실꾸미기하면서 적응하시면 됩니다. 수업이 배정되면 그때부터 시간당 1만원이 지급 될 거예요.” 아이에 대한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우선했는데 면접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한 없는 무급노동을 하며 학원의 빈 교실에 아이를 방치해야 할 상황이 그려지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 미술학원은 F씨가 얻게 되는 기회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선생님께서 미리 유의하셔야 할 점은 2주 간은 무급근무를 합니다. 아이들 얼굴도 익히고 일도 배워야 하니까요. F씨의 학벌이 훌륭해서 학부모님 보기에도 좋고 저희도 선생님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학원근무 경험은 전혀 없으시잖아요. 저희 구인 조건에 경력무관인 이유가 교육 매뉴얼이 다 나오거든요. 매뉴얼로 선생님들 교육시켜드리고 경력도 쌓아 드리게 되는 거니 좋은 기회를 얻으시는 겁니다. 기회에 투자한다고 생각하시고 근무하시면 좋겠습니다. 2주 후에는 수업 전에는 한 시간씩 연구시간을 가지고 수업 후에는 정리와 회의가 있는데 이 모두 시급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정규직 전환을 조건으로 당장은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실 거고요. 문의하신 정규직 전환은 3개월 후다, 1년 후다 이렇듯 확실하게 말씀드리기 힘든 상황입니다.” 원장의 말은 기회를 제공하지만 정규직 전환은 결국에 가능성이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 미술학원은 다급했다. “저희는 F씨와 같이 일해보고 싶습니다. 내일부터 당장 출근하실 수 있나요? 아이 스케줄을 조정할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조금 양보하더라도 다음 주 부터는 출근을 하셔야 합니다. 그게 불가능하시면 저희와 함께 일 할 수가 없겠네요. 시간활용이 용이한 20대 선생님들도 얼마든지 구하거든요.” 그들은 다급한 것이 아니었다. 구직하는 사람의 상황은 배제한 채 근무 조건만 일방적으로 내세우며 자신들의 충분한 선택지에 대해 언급했다.      


 F씨는 면접을 보고 돌아올 때 마다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데 며칠 씩 걸렸다. 그녀가 배우고 매진해왔던 것을 가지고 사회로 다시 나가고자 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욕심을 내려놓고 지원한 일자리였다. 무급기간에 일에 적응하라. 우리 측의 요구에 맞춰 즉시 출근하라. 연구와 회의는 무급이며 의무이다. 노하우를 전수하니 기회로 생각하라. 와 같은 말들은 아무리 곱씹어도 부당했다.


“일터에 있는 시간동안 9살 난 딸아이는 학원을 전전하겠죠. 출퇴근에 왕복 두 시간은 소요되더라고요. 버는 만큼 고스란히 돌봄비용으로 지출될 거라는 점을 감안하고 구직을 했어요. 마음 단단히 먹었다고 자신했는데 제가 맞닥뜨린 상황은 저를 절망하게 했습니다. 이쯤 되면 집 아래 편의점에서 시급제로 일하는 편이 훨씬 속 편하고 수입으로 따져도 이익이겠죠.” 

     

F씨는 담담하게 자조하며 생각했다. 만삭의 몸으로 퇴사한 그 길로 나의 가치는 어디까지 떨어진 걸까. 그 가치라는 게 남아 있기는 할 걸까. 목표를 정하고 치열하게 노력하고 달성하는 수순에 익숙했다.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결혼과 출산 육아로 잠깐 멈추어 있던 그녀의 시계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F씨는 일을 통해 삶의 밸런스를 찾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건강하게 벌고 건강하게 소비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경력이 단절되고 근무가능한 시간이 제한적인 그녀는 그저 만만한 착취의 대상에 불과했을까. 넘을 수도 부술 수도 없는 크고 단단한 벽을 경험했다. 깊은 구덩이로 고꾸라지는 느낌이 든다. 무기력이라는 구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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