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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May 20. 2021

너무 힘들면 그냥 그만둬버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

  사실은 형한테 미안한 게 많아. L은 밀크티가 담긴 세라믹 잔을 그러쥐며 말했다.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가장자리로 보이는 하얀 거품이 금방이라도 넘칠 듯 흔들렸다. 우리는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는 화실로 썼던 공간인지, 투명한 천장으로 빛이 들어와 주변을 밝게 물들였다.


  L은 원래 마이스터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 했던 건 형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설득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막상 형이 적응 못하고 힘들어하니까 자신에게는 다른 학교에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고 했다. 직접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형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지 않냐며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형은 전문대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졸업 후에는 중소기업에서 엘리베이터 수리를 시작했다. 일은 적성에 맞았지만, 가족들은 안전사고를 걱정했다. 같은 직종의 낙상 사고가 자주 뉴스에 나왔다. 형의 근무조건도 열악하긴 마찬가지라, 회사에 일손이 없을 땐 2인 1조로 해야하는 작업을 혼자 전담하기도 했다. L은 형에게 연락할 때마다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바쁘고 정신없는 걸 알지만, 그래도 꼭 조심하라고.


  부모님은 형에게 경력도 찼으니 조금 더 큰 기업에 원서를 써보라고 설득했다. 그건 본인한테도 좋은 일이었기에 형은 퇴근 후에 여러 기업에 채용공고를 살펴가며 이직을 준비했다. 대부분은 1차 원서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긴 시간 준비한 정성이 닿았는지, 이름 있는 대기업 채용에서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고, 며칠 전 합격 통보를 받았다.


  가장 기뻐했던 건 역시 부모님이었다. L은 부모님이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으며, 부모님은 쉴 틈 없이 형을 칭찬했다. 우리 아들 고생했다 장하다. 형은 쑥스럽게 웃으면서도 역시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집 안에는 따뜻하고 몽글한 행복이 피어오르는 듯 했다.


   *


  그런데 그때, L은 아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형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다 잘 되었고 기쁜 일만 가득한 자리에서,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쓸데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기분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L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다 형을 따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모님에게는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밖에서는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하는 말 다 무시해도 좋다고 했어. 괜한 기우일 수도 있고,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혹시라도 너무 힘들면, 그냥 그만둬버리라고 했어. 남의 시선 같은 거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누군가의 격려나, 축하나, 기대 같은 게, 형에게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말을 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L은 세라믹 잔을 입가로 가져가 천천히 한 모금을 마셨다. 호록, 소리와 함께 불안하게 흔들리던 거품이 금세 가라앉았다. 나는 L과 함께 보냈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우리는 어떤 말을 들었을까. 자격증 공부를 하고, 성적을 관리하고, 취업을 준비하며, 나와 주변 사람들이 끊임없이 듣고 재생산했던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


  너는 훌륭한 일은 한 거야. 여전히 잔을 그러쥔 L을 보며 나는 겨우 그 짧을 문장을 완성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문장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밀리고 밀려서, 아무도 하지 않아서, 불편하고 쓸데없이 느껴져서, 결국 가장 필요할 때를 놓쳐버리곤 하는 말이었다.     


  최소한의 비상구라고 생각했어. 그 사람이 어디에서 갈 수 없을 때,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해줘야 한다고. 그래야 살 수 있다고. L의 이야기가 무거워 나는 잠시 숨을 삼켰다. 카페 곳곳을 밝히는 빛은 의자와 탁자 사이를 지나며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단순히 힘들면 그만두면 되는 게 아닐텐데. 그럴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텐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맥락을, 사건을, 이야기를 외면하고 사는 걸까.


  L이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하지 않은 말의 무게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부당한 일이었는데,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 걸까. 거품처럼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 같아서, 나는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그러쥐고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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