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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May 21. 2021

학교 가기 싫어. 나도 엄마처럼 집에서 놀고 싶어.

간혹 주변에서 ‘집에 논다’라는 표현을 듣기도 하지만 그러려니 합니다

  철마다 잼을 끓인다. 딸기의 단물이 빠지는 3월의 끝이면 딸기잼을 만든다. 5월이면 새로운 맛을 곁들이기 위해 무화과를 사다가 잼을 담는다. 6월엔 친정 밭에서 난 살구와 복숭아를 가져다가 잼을 끓이고 여름의 끝 무렵엔 포도잼을 만든다. 겨울의 목전 11월이면 사과껍질을 벗기고 잘게 썰어 졸인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면 귤을 사다가 귤잼을 넉넉히 만들어 둔다. 같은 잼도 점도를 달리하면 다른 종류의 음식이 된다. 과육을 쪼개거나 갈지 않고 그대로 살린 채 화이트와인 한 병과 설탕을 듬뿍 넣고 졸이면 복숭아 병조림이나 딸기 콤포트, 살구 콤포트를 맛볼 수 있다. 잼보다 촉촉하고 과육이 신선하게 살아있는 콤포트를 빵에 올려 곁들이면 그만한 풍미도 없기에 빼놓지 않고 따로 만들어 둔다. 


 잼을 끓일 때의 고충이라 하면 끓어 넘치지 않게 불 조절을 민감하게 해줘야 하고 눌어붙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저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과일을 사다가 씻고 다듬고 적당한 크기로 썰고 동량의 설탕을 넣고 끓이면서 잼이 완성될 때까지 솥단지 앞을 떠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은 미리 잼을 담을 그릇을 열탕 소독해서 건조시켜 두는 일이다. 잼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다. 이렇듯 손이 많이 가지만 두 아들과 남편이 유난히 빵을 즐기기에 E씨가 매년 거르지 않고 수행하는 잼 끓이기 프로젝트다.     


“그때그때 해두면 그리 어렵지 않고요. 난이도가 놓은 간장, 된장, 김장김치는 친정의 신세를 지고 있으니 아직 주부로서 하수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것들도 언젠가 제 손으로 하게 될 날이 오겠지요. 어쨌든 잼은 철마다 종류별로 만들어두면 일 년 내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기쁨이고 보람이죠.”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입시학원에서 고등학생들을 가르쳐왔던 E 씨는 결혼을 하면서 전업주부가 되었다. 양가 부모님과 남편이 E 씨가 살림만 하기를 원했고 그에 대해 별 반감 없이 가정주부로 살았다. 큰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벌써 햇수로 주부 15년 차다. 주부로서 일과는 남편과 아이의 아침을 챙기고 직장과 학교에 보내놓고 나면 부엌을 정리하고 집 전체를 정리한다. 아토피가 있는 아이를 위해 환기와 침구세탁을 자주 하는 편이고 집안 먼지 제거에 신경을 많이 쓴다. 정돈이 마무리되면 곧장 장을 보러 간다. 주로 유기농마트를 이용하고 그날 먹을 만큼 소량만 구입하는 편이다. 집에 돌아와 식재료를 정리하고 저녁에 요리가 바로 되도록 준비를 해둔다. 국물의 육수를 내거나 채소를 데쳐서 무쳐두기도 하고 간단히 밑반찬을 만들어 두기도 한다. 


 짬이 날 때 해두는 중요업무 중 하나는 다림질이다. 매일 정장을 갖추어 입는 남편의 셔츠를 깨끗하게 세탁해서 빳빳하게 다림질하여 나란히 걸어둔다. 남편 것을 챙기면서 아들의 교복 셔츠도 함께 손본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하는 작업이고 시간이 제법 걸리지만 세탁소를 이용하기보다 정성을 다해 다림질하기를 자처한다. 하얗고 매끈하게 열 맞춰 걸린 셔츠를 보고 있으면 개운해지는 기분을 놓치기 싫어서다.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나서 한숨 돌릴 만하면 초등학생 둘째가 하교할 시간이 온다.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간식을 챙긴다. 따로 학원을 가지 않는 아이의 숙제와 수학연산, 영어 공부를 챙기고 나면 저녁 준비를 시작한다. 퇴근하고 돌아온 큰아이와 남편을 맞이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다.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과일을 깎아 낸다. 밤 10시경 둘째 아이의 잠자리를 살피고 나면 E 씨의 일과가 마무리된다.


“주부로서의 생활이라고 하면 만족할 것도 불만족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이게 제 삶이니까요. 가족 모두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크는 모습을 보는 것과 남편이 사회생활을 잘하도록 내조하는 것이 보람 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한파 중에 외투를 여미며 시장에 나갔다가 싸고 싱싱한 귤을 한 박스 들였다. 오늘도 잼을 끓인다. 한 개씩 껍질을 까서 믹서기에 모아 가볍게 갈아 준다. 설탕을 붓고 큰 솥에 가스 불을 켠다. 가스레인지 앞을 떠나지 못하고 지켜보다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불을 낮춘다. 문득 아침에 초등학교 2학년생인 작은 아이가 뾰로통한 얼굴로 내뱉은 말을 곱씹는다. ‘학교 가기 싫어. 나도 엄마처럼 집에서 놀고 싶어. 엄마는 만날 집에서 놀잖아.’ E 씨는 나무 주걱으로 천천히 솥을 저으며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큰아이 키울 때는 전업주부로서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집에서 논다’라는 평가와 편견에 당당하지 못했죠. ‘집에 노는 사람’은 전업주부의 다른 말이기도 하잖아요? 이제는 좀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요. 간혹 주변에서 ‘집에 논다’라는 표현을 듣기도 하지만 그러려니 합니다. 보다 단단해 졌지요. 내가 전업주부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으니까요. 순진무구한 아이의 말에 웃음이 납니다. 우리 집 둘째 녀석이 매일 먹는 잼은 그저 땅에서 솟는 것이 아닌데. 마냥 귀엽죠.”     


 향긋한 냄새를 머금은 금빛 잼이 완성되어 간다. 점도가 높아질수록 자주 저어야 하고 팔에 들어가는 힘의 강도는 높아진다.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솥단지에 원을 그린다. 천천히 지속적으로 원을 그린다. 그렇게 그녀는 잼을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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