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세상과 연이 끊어진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대학 4학년 때 미래를 함께 그릴 사람을 만났다. 커플은 졸업 후 각자 목표했던 기업에 성공적으로 입사했고 결혼을 약속했다. 부부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았다. 결혼 후 3년 간 경력을 쌓은 후에 나란히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자고 계획했다. 공부를 마치고 그곳에서 자리 잡은 뒤 둘 사이의 아기에 대해 생각하자고 큰 그림을 그렸다. 유학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결혼식을 검소하게 치르고 신혼살림을 간소하게 마련했다. 일과 영어공부를 병행하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목표를 생각하며 함께 견딜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력 2년을 채우기도 전에 계획에 없었던 아기가 찾아왔다. 부부는 기쁨보다는 혼란이 앞섰다.
계획의 전면수정이 필요했다. 남편은 영국으로 먼저 떠나고 G씨는 한국에 남아 출산을 하고 출산휴가 3개월 뒤에 복직하기로 했다. 일을 계속하다가 남편의 공부가 끝날 즈음, 아기를 데리고 영국으로 뒤 따라 가기로 했다. 남편이 영국에서 취업을 하면 아이는 보육시설에 갈 수 있을 테고 그 시점에 G씨가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출산과 육아를 생각해야했고 생활비와 학비를 고려했을 때 순차적으로 입학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계획은 빗나갔다. 과중한 업무로 야근에 시달리던 남편은 막바지에 유학준비를 위한 시간확보가 절실하여 예상보다 일찍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G씨는 조산기가 있어서 출산 전에 퇴사를 하게 되었고 출산과 산후조리를 위해 부산에 있는 친정으로 내려갔다. 아기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유학준비를 끝낸 남편은 서울 집을 정리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친정 부모님은 첫 손주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아주셨다. 예상치 못한 일상이 펼쳐졌지만 아기가 커가는 모습,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에 G씨도 행복했다. 그러나 비축한 예산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G씨는 아기가 7개월이 되었을 때 친정엄마께 양해를 구하고 직장을 얻었다.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의 매장 관리업무였는데 매장 문을 열기 전에 출근해 제품을 디스플레이하고 매장 환경을 점검하는 일이었다. 한참 자고 있는 아기를 두고 출근을 하고 나면 아기는 눈을 뜨자 확인한 엄마의 부재에 곧장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새벽에 나가 오후 5시 경 퇴근하고 6시에 집에 돌아오면 아이 안아주기 바쁘게 이유식을 만들어야 했다. 짬나는 대로 아기와 놀다가 밤이 되면 아기는 떼를 쓰고 잠을 거부했다. 아이의 고집이 늘어 친정엄마도 힘들어하시고 무엇보다 또래와 있을 때 아이의 불안도가 남다른 모습이 확연했다. G씨는 휴가를 내고 몇 군데 유아심리 상담센터를 찾았다. 결과는 모두 비슷하게 분리불안이라고 했다. 생후 7개월 인지가 발달되는 중요한 시기에 엄마와 떨어져서 주양육자와 부양육자의 구별이 모호해 아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 했다. 상담사는 아빠의 부재도 언급했다. G씨는 죄책감이 들었다. 이 모든 결과가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이의 중요한 시간을 놓치고 방치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상담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이라면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금방 지나가는 일이고 아기도 나도 잘 이겨낼 수 있다고요. 당시엔 그 모든 상황이 아기에게 치명적인 상처로 남는 게 아닌가 겁이 났습니다.”
부산과 영국, 두 집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던 일자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당시로서의 최선이었다. 사직서를 내고 아침에 눈떠서 잠들 때 까지 아기와 함께 있으니 아기의 불안감이 현저하게 줄었고 친정엄마도 편안해졌다. 생활이 빠듯해졌지만 행복했다. 아기가 세 살이 되고 남편의 졸업을 몇 개월 앞둔 시점에 아기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K씨가 공부할 현지의 학교를 알아보고 남편의 취업준비를 도울 겸 시기를 몇 개월 서두르게 된 것이다. 아기와 단둘이 꼬박 11시간을 비행해서 영국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영국 땅을 밟았을 때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도착한 곳은 부엌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쉐어하우스에 남편의 단칸방이었어요. 아기를 키우기에 불가능한 환경이었죠. 런던의 집세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았지만 셋이 살 수 있는 집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계획한 모든 비용은 예상을 넘어서고도 남았습니다. 제 공부를 조금 미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때 마침 영국의 EU 탈퇴에 대한 찬반여론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민감한 상황 속에서 영국 내 취업시장은 이민자들에게 냉담했다. 남편의 구직은 수도 없이 쓴맛을 보았다. 그러던 중 한 중견기업에서 합격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국인으로서는 유례없는 성공적인 취업이라 평가받았다.
“취업에 성공한 남편이 자랑스러웠지만 저는 웃을 수만은 없었어요. 남편의 회사는 런던에서 4시간 떨어진 뉴캐슬에 위치했기에 가족 모두 이사를 해야 했거든요. 제가 희망하던 학교는 모두 런던에 있어서 사실상 제 공부는 미루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려놓아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남편의 취업으로 가장 중요한 비자문제가 해결되었어요. 학생비자가 종료되면 취업비자가 있어야 가족모두 영국 내 체류할 수 있었지 때문이죠.”
새로운 도시에 둥지를 틀고 결혼하고 처음으로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이 안정되었고 영국의 근무환경은 한국과는 달리 여유로웠다. 늦은 오후면 퇴근이 가능했고 수시로 휴가가 있어서 가까운 유럽등지로 쉽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도처의 공원과 광활한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아이는 자라서 공립학교의 유치원과정에 입학했고 무난한 영국생활이 이어졌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를 얻었고 영국 지방도시의 여유로움 누려봤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문득문득 한국에 두고 온 대기업 사원증, 시작도 못한 공부와 완성되지 못한 제 이력서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계획이라는 녀석은 너무 자주 경로를 이탈했어요. 그것을 수습하면서 10년을 보내고 나니 이제 나이 40을 바라봅니다. 아직 공부와 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는데 오랫동안 세상과 연이 끊어진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완성되지 못한 이력서는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런던의 단칸방을 아장아장 걷던 아이는 10살이 되었다. 그녀의 표현대로 계획은 예상치 못하게 자주 경로를 이탈했지만 그녀는 이탈한 경로 안에서 그때의 최선으로 살아왔다. K씨의 일과 공부에 대한 열정이 오랫동안 식지 않았기를 바라본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실현되어 그녀의 삶이라는 이력서가 완성되기를 바라본다. 그녀의 치열한 시간들이 그것을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