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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Jun 03. 2021

그때 욕이라도 할걸

무미건조한 정보로 치환된,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봤다

  오후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접이식 우산을 가방에 넣어 두고 밖으로 나갔는데, 아직 햇살이 드물게 길을 밝히고 있었다. 빛이 쏟아지는 곳은 따뜻했지만 걷다 보니 손끝이 시렸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몸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함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 같은 것. 나는 그 감각을 뭐라고 부를지 고민하다, 별다른 말을 찾지 못한 채 두 손을 외투 주머니 안으로 찔러 넣었다.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하지만 곧바로 글을 쓰진 않았다. 쓰고 싶은 글이 없다기보다는 아직 그것들을 제대로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개인적인 일이 많았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어느 쪽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일들까지 포함해서. 글쓰기 규칙 같은 걸 정해두진 않지만 잘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선 쓰지 않기로 했다.     


  결국 그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다리를 꼬고 앉아 집에서 들고 온 [위대한 개츠비]만 줄창 읽었다. 개츠비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를 묘사한 20페이지의 장황한 문장들을 따라가다 잠시 숨을 돌릴 즈음이었다. 옆 테이블에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앉더니 꽤 큰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했다. 멍하니 있다 보니 우연히 그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트렌스젠더 하사 있잖아... 부대에 이야기도 안 하고 자기 멋대로... 당연히 복직 안되는 거잖아... 얼핏 들어보니 성전환 수술 후 군 복직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하던 이의 이야기인 듯 했다. 대화를 주도하는 남자는 꽤나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어갔는데, 나는 심기가 불편했다. 그의 이야기에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섞여 있어서였다.


  그는 '의료목적'이 명시된 국외 휴가 승인을 받고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휴가 전에는 소속 부대의 고위 지휘관들과 장교들에게 상의했고, 소속 부대원들 또한 그의 결정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었다. 하지만 육군 본부와 국방부는 이를 보고 받은 사실이 없으며, 마치 그가 독단으로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그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임을 증명할 근거는 없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증명할 근거도 없었다.


  적어도 우리는 그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병사 개인이 성별을 바꾼다는 인생의 큰 선택을, 과연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배제하고 고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옆 테이블의 남자는 완벽한 근거가 있다는 듯 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 선언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모자라고, 한심하며, 어리석은 인간임을 확신하는 듯 했다.     


  나는 묻고 싶었다. 당신은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아니, 우리는 누군가와, 누군가가 겪는 사건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당신의 확신은 대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당신이 떠드는 이야기는, 어떤 책임과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우리는 소수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정말 관심이 없다. 나는 간혹 사람들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를 쓰고 여러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을 때면 그랬다. 직업계고 학생들의 학교생활은 어떤가요? 특성화고와 마이스터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현장실습생과 일반 취업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아무런 악의가 없는, 오히려 너무 소중한 관심과 만남의 자리였지만, 나는 때때로 아득해지고는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건가. 우리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가 '뭔지'부터 말해야 하는 건가. 직업계고 학생들이 어떤 교육을 받는지 정말 몰랐단 말인가. 현장실습생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면서, 사실은 현장실습생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몰랐단 말인가. 그러면서 정책이나 법안이나, 공평이나 정의에 대해 이야기했단 말인가. 세간에 떠도는 말들과 현실의 격차가 너무 아득해서, 나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자 황급히 가방을 챙겨 카페 밖으로 나왔다. 옅은 빗방울이 얼굴 언저리로 떨어졌다. 나는 가방 안의 우산을 꺼내지 않고 한동안 걸었다. 차갑게 식은 공기를 마시니 진정이 됐다. 외투 자락이 조금씩 젖어 드는 게 느껴져 우산을 폈다. 들고 다니기 용의한 만큼 작은 우산이었지만, 빗줄기 사이에서 나의 영역을 마련해주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불편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니, 나도 해당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기에 그사이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사실이 드러났을지도 몰랐다. 더 자세히 알아두어야겠다 싶어 별다른 고민 없이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했다. 그리고 그 기사를 봤다. 무미건조한 정보로 치환된,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봤다.


  아, 그때 욕이라도 할걸. 옆자리 테이블을 걷어차며 당신의 말이 역겹다고. 치가 떨린다고.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고 소리라도 지를걸. 그랬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조금은 나아졌을까. 아니, 도대체 나는 지금 누구에게 화를 내고 싶은 걸까. 자기 영역을 지키는 것조차 벅찬 주제에, 뭐가 잘났다는 듯 누군가를 평가하고 원망하고 있는 걸까.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고 있으니, 피가 통하지 않아 끝이 시렸다. 이 감정을 제대로 설명할 말을 나는 끝내 찾지 못했다. 힘없는 말들은 바람에 흩날리다 거리 어딘가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둠에 가려져 있었지만, 창백한 가로등 불빛 속을 통과할 때는 분명 선명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아주 작은 무게로도 세상을 향해 내리는,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지는 것들의 흔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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