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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Jun 21. 2021

가정의 행복과 회사의 행복은 일치할 수 없는 걸까

그래, 이제부터 실전이다!

 청첩장을 받는다는 핑계로 떠들썩한 호프집에 대학동기 여럿이 둘러앉았다. 갓 나온 생맥주를 한 모금씩 들이키자 오늘의 주인공이 봉투를 하나씩 돌렸다. 하얀 종이에 금박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를 더듬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언제까지나 철없던 대학생, 방황하는 20대일 것 같았는데 서른이 되자마자 친구 놈의 결혼소식을 듣게 되다니. 술자리가 무르익고 기분이 들뜬 예비신랑은 불콰해진 얼굴로 말했다. 내가 니들 중에 취업도 가장 먼저하고 결혼도 가장 먼저 했으니 아이도 가장 먼저 낳을 것이라고 목소리 높였다. 워.... 여기저기서 부러움이 섞인 야유가 터졌다. p를 제외하고 모두 대기업에 다니는 동기들의 대화는 직장생활, 연봉, 승진, 연애와 결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다 괜찮았는데, 직장 상사의 출산이야기 부터 p는 자리가 불편해졌다.


“ 우리 팀장님은 3, 4년째 얼굴 보기가 힘들어. 결혼은 진즉에 했는데 임신이 어렵게 되어서 노산을 했어. 출산하고 1년 넘게 휴직했지. 복귀해서 6개월 만에 또 둘째를 임신을 했어. 곧 휴직에 들어가. 이래가지고 책상이 남아나겠냐? ”

“ 우리 팀 대리는 아기 낳고 휴직했다가 복직할 때쯤 갑자기 퇴직을 하더라고. 민폐가 따로 없지. ”

“ 유부녀들만이 아니라 여자 신입들 문제가 많아. 몰려다니면서 말이나 만들고 치장하는데 온 신경을 쓰고 그런 신입들 가르치고 사고를 수습하느라 애 먹는다니까. ”

“ 걔네들이 결국에 결혼한다고 관두고 아이 낳는다고 휴직하는 거 아니냐. ” 


한 친구가 예비 새신랑에게 아기가 태어나면 제수씨 직장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마냥 들떠 있던 새신랑의 갑작스러운 침묵에 모두가 당황했다. 새신랑은 한참 그대로 있더니 말을 이었다.


“ 글쎄...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장모님이나 엄마한테 부탁해야겠지? ”

“ 그래. 제수씨도 일은 계속해야지. ” 

“ 요즘 세상에 외벌이가 웬 말이냐. ”

“ 대출이랑 아이 키우는데 들어가는 돈 생각하면 일을 놓으면 안 되지. ”


p는 점점 말을 잃었다. 임신과 출산을 대하는 태도와 여성이 사회적으로 몫을 다하길 바라는 양가적인 시선 앞에 입을 닫고 말았다. 최근에 여성의 경력단절에 대한 책을 기획하고 있는 입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지는 비난과 혐오와 대책 없음에 대해서 쏟아낼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목소리를 내고 낡은 시선에 대해 쓴 소리를 했을 때 친구 녀석들의 반응은 익히 예상되는 바이다. 약자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그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하기보다 익숙한 관념과 세상의 통념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하고 쉬울 테니까. 오늘은 대기업 사원들 앞에서 따분한 잔소리나 해대는 문화계 종사자가 되기보다 조용히 술만 홀짝이는 사람이기를 택한다.      


 어제의 숙취를 실감하며 출근했다. 청년노동에 관련된 인터뷰를 위해 자료를 찾고 인터뷰 대상자를 물색하면서 오전시간이 바쁘게 흘러갔다. 점심시간이 되어 여느 때와 같이 배달음식을 시키려고 모여들었다. 중국집으로 할 것이냐 백반집으로 할 것이냐 의견을 모으는 중에 m선배가 어두운 낯빛으로 저는 오늘 빼주세요 했다. 선배는 자리에 앉은 채로 가방에서 작은 통을 꺼냈다. 오렌지와 키위가 전부인 과일도시락이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p에게 선배는 눈을 한 번 찡긋 하더니 파티션 너머로 목을 치켜들고 사무실 전체를 향해 수줍게 말했다.


“ 저 임신했어요. 지난주에 알게 되었어요. ” 


사무실을 같이 공유하고 있는 옆 회사의 직원들까지 모두 축하의 말을 건네며 기뻐했다. 떠들썩하게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온 p는 밀려드는 복잡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m선배가 아기를 가졌다. 입사 4년 차이자 결혼 3년 차인 선배가 그간 얼마나 임신을 기다려왔는지 p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축하하는 마음과 별개로 머릿속에서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선배의 출산예정일은 언제이고 출산휴가는 언제까지 쓰게 될까. 무사히 복귀할 수 있을까. 태어난 아기의 양육은 누가 맡게 될까. 재택근무를 하게 된다면 일에 차질은 없을까. 선배의 빈자리를 대신할 누군가에게 주어진 시간동안 제대로 된 인수인계가 가능할까. 회사가 도약하는 시기에 그 중심인물이자 꼬박 3년을 함께 손발을 맞춰온 동료가 곁에 없을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 선배 속은 좀 괜찮아요? ”


“ 응. 그런데 너무 졸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임신초기에 이렇게 졸음이 쏟아진다네. 일의 효율이 심하게 떨어진다. ”


선배는 퀭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한 뒤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고 보니 정말 선배는 오전에 붙잡고 있던 일에서 그다지 나아가지 못했다. 임신을 한다는 게 이토록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구나 느끼면서 새삼스러웠다. 변화는 개인 뿐 아니라 개인을 둘러싼 관계와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동안 사회문제 그 중 특히 여성문제에 늘 관심을 가져왔고 이에 관한 책을 기획해왔기에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넓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있다 생각해왔는데. 늘 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고 자신해왔는데. 무지한 친구 놈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해왔는데. 정작 일터에서 마주한 최초의 경험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자신에 대해 당황하고 말았다. p는 어정쩡하게 선 채로 비로소 현실에 발을 내 디딘 것이다.    


 어제의 불편한 자리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함구하고 자리를 지키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남자인 자신이 만약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상황이라면 회사에서 환영받을 것이다. 가장으로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겠노라고 축하와 격려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임신을 한 여성은 어떠한가. 친구 녀석들 대화 중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직에 피해를 끼치는 사람,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기 쉽다. 당사자의 마음은 어떨까. 기다렸던 임신이지만 한참 일의 능률이 오르고 능력을 펼칠 시기에 단절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겪으면 어떨까. 언젠가 미래에 내 아내에게도 벌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정의 행복과 회사의 행복이 일치할 수 없는 것인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요즘 고민하는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 청년문제, 노인문제, 여성문제, 동물권문제 등 다양한 아픔에 귀 기울이고 계속해서 세상에 이야기 되어 지도록 애쓰는 것. 선배의 휴직기간을 남은 동료들과 힘을 합하면서 선배의 복귀를 응원할 것. 이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선배의 출산과 휴직, 성공적인 복귀가 우리 회사에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을 테고 이는 후배와 이웃에게 좋은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층 성장해 있을 스스로에 대한 기대도 크다. p는 마음을 다 잡았다. 그래, 이제부터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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