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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Sep 25. 2021

조남주, "귤의 맛"

우리 모두 겪었지만, 성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영원히 다시 맞이할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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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귤의 맛은' 4명의 '여성 청소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대개, 청소년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설이건, 드라마건 상관없이 똘똘 뭉쳐있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집중한다. 반면, 이 소설은 4명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개개인 삶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같은 중학교 동아리 친구들의 이야기이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의 목차에도 '우리'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이 있고, 그에 관한 각자의 사연이 있다. 각각의 목차는 한 사람의 이름을 걸고있고, 그런 사연들이 이어진다.


  4명 중 주인공이라 할 만큼 비중이 크거나, 유독 영향력이 큰 사람은 없다. 그저 각자 살아가는 사람 넷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에 빠져들려고 할 때쯤, 다른 사람의 사연으로 넘어간다. 한 명의 이야기가 길어지면, 독자는 그 삶을 중심으로 책을 읽는다. '최애하는 캐릭터'가 생기면 그를 중심으로 관계가 재편된다. 작가는 이 4명의 캐릭터가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고, 그 사연과 아픔에 위계를 나누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시도는 꽤 성공적이다. 덕분에, 4명 모두의 사연과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 위계 없는 이야기가 주는 동등함과 팽팽함 속에서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잘 집중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한 명을 응원하는 '영웅'의 서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헤쳐나가는 각 개인들의 방법과 마음이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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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은 여성 청소년들이지만, 그들이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를 그 주위의 어른에게 부탁하는 형식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뜨거운 우정을 가진 친구들이 어려움에 처한 친구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함께 맞서며 우정을 북돋지도 않는다. 각각의 집에는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을 헤쳐나가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몫이다. 머리를 마주하고 고민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함께 실행하지 않는다. 각자의 문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아무리 아프고 힘든 상황이어도 그 선택과 책임만큼은 누구에게도 미루지 않는다. 오롯이 스스로의 몫으로 가져간다.


  어느 현실의 어른들이 그렇듯이, 소설 속 어른들도 청소년들의 문제를 본인들이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그런 시도는 각 개인들에게 무기력함을 가져다줄 뿐이다. 소설 속 청소년들은 아무런 힘도 없고 무기력하지 않다. 그렇다고 자신이 책임지지도 않아도 될 일을 지고 살아가는 초인적인 인간들도 아니다. 주체적으로 움직이며 생동하는 한 개인이다. '어린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하려고 애쓰는 '인간'의 이야기다.


 청소년 성장소설은 주인공들이 어떤 일들을 겪은 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이나, 직장, 가정을 꾸리는 행복한 모습을 그리며 마무리 짓는다. 응답하라 시리즈들의 결말이 항상 동창들의 행복한 모임으로 끝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은 고등학교 입학에서 멈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 '시간이 답이다'는 어설픈 낙관에 기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일은 없다. 절친했던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하나밖에 없던 친구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하고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서 흐려지고 긍정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고, 현재를 살아가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서로 다른 순간을 삶을 살아내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에도 각자가 가진 고민과 어려움, 집안 사정, 불안한 미래의 두려움을 간직하고서 끝난다. 큰 위기는 넘어간듯싶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앞으로 산적해있다. 그저 한고비를 넘기고 겨우 넷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서 사진 한 장을 찍을 수 있는 여유를 찾았을 뿐이다. 이 넷의 관계도 영원히 깨지지 않는 맹약으로 엮여있지 않다. 갈등했던 주제들은 여전히 산재해 있고, 언제든 헤어질 위기가 있음을 인정하며 끝난다. 가까운 미래에 이들에게도 갈등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떠날지도 모른다. 그 이전에도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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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인 '귤'은 2가지의 모습이 있다. 하나는 초록색을 띠기 시작할 때쯤 수확해서 박스에서 노란색이 되어가는 설익은 귤과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서 끝까지 햇빛과 양분을 받아먹으며 노란색이 된 귤. 그 둘은 겉으로는 차이가 없지만, 확연히 다른 맛을 보여준다. 인간 세상의 이야기로 끌어오자면 전자는 너무 이른 시기에 성장이 끝났다고 선언하고 멈춰버린 사람이고, 후자는 끝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성장하며 자라나는 인간이다.


  이만하면 세상과 삶에 대해 알았다고 자만하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다. 실은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아서 멈추는 것이지만, 자신의 삶이 완성되었노라 외치고 삶의 길목에서 나아가길 멈춘다. 하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쉽게 멈출 수 없다. 비슷한 시련이 반복되고, 똑같은 이별이 데자뷔처럼 이어진다. 이만하면 충분히 알고, 충분히 아팠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만남 앞에 새로운 고통이 기다린다. 그 순간에 삶의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것인지,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인지. 이 책을 '어린아이들의 이야기'쯤으로 치부하려는 마음이 샘솟는다면, 스스로가 박스에 담겨있는 귤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내 삶의 문제들을 또 얼마만큼 직면하고 살아가고 있을지.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 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귤의 맛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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