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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Aug 25. 2022

#당신이 꼭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학교폭력의 기억.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는 인간은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주기 어렵다. 미운 사람만 골라서 증오하면 좋을 테지만 마음이 그렇게 편리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폭력에 강하게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은 다양한 이들을 증오한다. 때렸던 가해자, 구경만 했던 사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던 선생. 가장 증오스러운 것은 본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소위 ‘양아치’한테 찍혔다. 1학년 때까지는 나름 친분이 있는 사이였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놈에게 찍혔다. 화장실에 끌려가서 뺨을 맞고, 복도에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벽에 몰아세우고 욕을 했다.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나는 돈이 없었다. 그때마다 놈은 너희 부모는 거지새끼냐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화가 나고 분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복도에서 지나는 이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싫었고, 비웃음거리조차 되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두들겨 맞고 있는 것도 싫었다. 어떻게 해야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 몰랐다. 이 끔찍한 지옥이 끝날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없었다. 


놈과 나는 같은 ‘ㅇ’으로 시작되는 이름이라 놈과 나의 번호는 27번과 28번이었다. 짝꿍이었다. 음악시간, 컴퓨터 시간, 체육시간까지 항상 놈의 옆자리는 나였다. 교사의 눈이 미치지 않는 은밀한 공간에서 끊임없이 맞았다. 놈이 왼쪽에 앉은 날은 왼쪽 팔뚝에 멍이 들었고, 오른쪽에 앉은 날에는 오른쪽 팔뚝에 멍이 들었다. 가끔 놈은 물었다. 니 몸에 멍든 거 부모님이 보고 물어보지 않느냐고. 나는 우리 부모님은 그런데 관심 없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웃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놈의 심기를 거스르면 멍만 커질 뿐이었다. 그렇게 내리 1년을 맞았다. 


매일 맞았다. 시험을 치는 날에는 공부에 손을 놔버린 놈이 열패감 따위를 느꼈는지 나를 감정 샌드백으로 썼다. 시험 치고 집에 가려고 하던 차에 영문도 모르고 명치를 맞았다. 왜 맞았는지도 몰랐다. 너무 아팠고 서러웠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학교에서 맞는 순간에도 울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울지 않았다. 정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울면 더 이상 삶을 지속할 수 없었을 터였다. 와르르 인생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일요일 밤이면 월요일부터 맞을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의 끝을 알리는 밴드 음악이 무서웠다. 


두들겨 맞은 날이면 놈을 의자로 내려찍어서 죽여버리는 생각을 했다. 학교에 가면 또다시 맞았다. 이 생활을 1년을 버텼다. 다행히 스스로 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놈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했다. 1년 내내 밤마다 놈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기를 기도했다. 


시간이 지나서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페이스북을 켜니 놈이 추천 친구로 떴다. 놈의 계정을 들어가 보니 몸이 떨렸다. 놈은 자랑스러운 아들로 가족사진 중앙에 웃으며 앉아있었다. 해병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놈 때문에 내 삶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하지만 놈은 누군가에게 사랑스러운 아들이었고, 나라를 지키는 자랑스러운 군인이었다. 놈이 사지가 찢겨서 죽기를 바랐다. 그 모습을 놈의 가족이 강제로 지켜봤으면 했다. 그렇게 해야 놈이 나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놈에게 두들겨 맞은 1년의 후유증은 다양하게 내 삶과 공존하는 중이다. 덩치가 있는 남성을 보면 극도의 위협과 불안을 느끼는 것. 타인의 선의를 믿지 못하게 된 것. 복도에서 놈에게 맞으며 그 장면을 다른 사람이 보았을 것이라는 불안은 자라고 자라서, 타인은 나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피해망상이 되었다. 


“당신이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책이 있다. 책의 작가님은 따뜻한 분이다. 분노와 증오보다는 사랑의 힘을 믿으시는 분이다. 하지만 난 그 문장이 정말 싫다. 그 문장을 인정하면 1년간 나를 죽도록 때린 놈의 행복도 누군가 빌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나를 생사의 갈림길로 처넣었던 놈이 사랑받으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비합리적인 생각이지만 1년간 두들겨 맞은 일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다. 그 어떤 학문도 인간이 그 정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14년 전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지금도 분노에 몸이 떨린다. 용서할 생각은 없고 자유로워지는 날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놈이 꼭 가장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죽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세상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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