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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Sep 15. 2020

서른 살 딸과 엄마의 에어로빅



엄마와 나는 거의 동시에 백수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빠도. 엄마는 아빠와 함께 32년간 식당을 운영했다. 연중무휴인 탓에 엄마와 아빠는 32년의 세월 대부분을 가족들이 '가게'라고 불렀던 일터에서 보내야 했다. 우리 식당의 전화번호 뒷자리는 엄마, 큰언니, 작은언니, 나, 남동생의 핸드폰 번호 뒷자리가 되었다. 식당은 오랫동안 우리 가족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엄마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엄마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엄마의 식당 주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대부분 우리 식당의 단골이었고 아빠 친구의 아내였다. 


내가 인정하는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딱 2명이다. 인수 오빠의 엄마라서 오빠의 이름을 딴 인수 이모와 키가 커서 그렇게 불리는 키다리 이모다. 엄마도 항상 내 앞에서 이모들을 그렇게 불렀다.


엄마는 종종 이모들을 만나서 시어머니, 남편, 주변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했다.


언젠가부터는 인수 이모가 우리 엄마 가게에서 일을 시작하셨다. 보험 설계사를 하시는 키다리 이모가 일을 보다가 우리 가게를 지나게 되면 꼭 식당에 들렀다. 세 사람은 사랑방이 된 우리 식당에 모여 주로 누군가의 욕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함께 웃다가 함께 화내주다가 했다.


키다리 이모는 마늘을 까고, 젓가락 정리를 도와주며 입을 바삐 움직였다. 키다리 이모는 나만 보면 "우리 공대여자는 다리가 참 예뻐. 쭉 뻗었어." 했다. 괜히 쑥스러운 나는 주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얼굴 예쁘다는 말은 이모에게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아 심술이 났다.)


세 사람 옆에 앉아서 소식통 키다리 이모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던 날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엄마와 엄마의 친구 인수이모와 키다리 이모가 손으로 뭔가를 하며 입으로는 수다를 떠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오랫동안 우리 식당은 엄마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식당이 위치한 건물의 주인이 바뀌고 엄마 아빠는 식당을 그만두기로 했다. 안 그래도 몸이 고단한 식당일이라 60살까지 했으니 오래 한 것 같다 했다. 지긋지긋한 식당일 인제 그만두게 되어서 속이 다 후련하다고도 했다. 


그런데 식당 영업 종료를 몇 주 앞두고는 "32년간 감사했습니다" 하는 플래카드를 식당 앞에 걸었다. 많은 손님이 아쉬워했고 슬퍼했다. 


엄마 아빠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곳에 있는 우리 식당 자리를 그 뒤로 한참 동안 지나다니질 못했다. 가로질러 가면 금방인 거리를 괜히 삥 둘러 간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사랑방이 없어졌다. 


항상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으면 친구들이 알아서 들렸는데. 그곳에 엄마 아빠가 없으니 친구들과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기 어려워졌다. 


아빠는 가게를 그만두고 주로 의기소침해진 듯했다. 그래도 아빠에게는 사냥, 등산, 약초 캐기, 심마니들 따라다니기 등 취미가 많았다. 아빠는 무기력을 금방 적응했고 반면에 엄마는 약간 더디 적응하는 듯했다. 


엄마에게는 취미 생활이 없었다. 아빠와 배턴터치하고 주말에 잠깐 가는 등산, 한 달씩 끊어놓은 목욕탕 출근이 다였다. 엄마가 식당을 그만두고 잠시 우울해하던 때를 지나 "나도 이제 재미나게 살아봐야지." 하고 가장 먼저 탐색했던 게 '아줌마들의 운동' 이었다. 


엄마 : 공대여자야. 엄마랑 에어로빅 다닐래?
공대여자 : 응? 내가? 엄마랑?
엄마 : 응! 엄마가 등록해줄 게 같이 다니자. 응??


"근데 엄마, 거기에는 다 아줌마들 뿐일 텐데. 나는 거기에 가기 조금 창피한데." 했지만, 엄마가 돈도 내준다고 하니 나중에는 못이기는 척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인수 이모는 아르바이트 다녀야 해서 바쁘고, 키다리 이모는 손주들을 봐줘야 해서 바쁘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와 같이 에어로빅을 시작했다.




엄마 손 잡고 처음 간 에어로빅 수업에서 우리 둘은 대체로 엉망이었다. 예쁘장하고 늘씬한 선생님의 구령과 선배 에어로빅인들의 동작을 주로 따라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일단 박스티에 반바지를 대충 입은 우리는 멋이 나지도 않았다. 


결국 엄마는 중간중간 고함을 지르는 구간과 손바닥을 치는 구간만 익혔다. 그러고는 대부분 엄마의 느낌대로 에어로빅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부끄럽기만 했다. 엄마와 나는 세트로 엉망이니 대부분을 문 앞에 선체 수업을 겨우 따라갔다.


스포츠 센터 주변에는 지역에서 가장 큰 전통 시장이 있었는데 에어로빅 이모들 대부분이 그곳의 상인들이셨다. 시장에 저런 예쁜 이모들이 있었나 생각했다. 이모들은 주로 형형색색의 쫄쫄이와 큐빅이 잔뜩 박힌 상의를 입었다. 신발과 타이츠도 주로 다채로웠다.


다가가기 힘든 에어로빅 이모들 사이에서 엄마와 나는 서로를 이용해 안면을 틀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고 나는 "엄마와 에어로빅하러 다니는 예쁜 딸", 엄마는 "딸과 에어로빅하러 다니는 부러운 엄마"가 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는 이모들 앞에서 유별나게 더 엄마를 챙기는 척했다. 


그렇게 이모들은 우리를 에어로빅 회원으로 끼워주었다.




공대여자 : 엄마! 에어로빅 가는데 김치는 왜 챙겨?
엄마 : 오늘 선경 언니가 찰밥해 온다 고 했어. 내가 김치 가져가기로 했고. 우리 겉절이 맛있게 돼서.
공대여자 :  엄마 운동하러 가는 거야 먹으러 가는 거야?


에어로빅 이모들은 하루걸러 하루씩 맛있는 음식들을 번갈아 가며 가져왔다. 엄마와 나는 세트로 대접받으니 나도 이모들의 잔치에 끼워주었다. 


한 시간을 발에 땀나게 뛰고 소리 지르던 이모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GX 실 바닥에 락앤락 통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삥 둘러앉은 이모들은 정성스럽게 반찬을 소분하고 밥을 나눠줬다. 


하산 후 막걸리를 먹으려고 등산을 하는 심정으로 에어로빅을 하셨던 거군. 하는 생각이 드니 이모들이 귀여워졌다. 


이모들이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기 시작할 때쯤 나는 상경하기로 했다. 토익점수도 만들었고 컴퓨터 자격증 학원도 다녔으니 이제 논술을 배워야 하는데 마땅한 학원이 우리 지역에는 없었다. 엄마를 닮아 추진력이 있는 나는 상경을 해야겠다고 엄마, 아빠, 할머니에게 통보했다.


에어로빅 이모들은 "야무진 우리 공대여자 금방 직장 구할 거야"라며 나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응원해줬다. 그리고 꼭 취직하면 다시 놀러 오라고 했다. 나는 그래도 엄마가 이모들과 친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했다.




엄마는 내가 쓰던 온수 매트를 차에 실어주고 할머니는 이불을 금색 보자기에 싸줬다. 아빠는 혼자 갈 수 있겠냐며 걱정했다. 나는 뭐하러 왔다 갔다 여러 명이 고생하냐며 내 차로 한 번에 옮기면 된다고 했다. 


29년 동안 가족들에게 했던 인사말이 "다녀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였는데 "조심해서 갈게요." 하니 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4시간 30분 만에 서울 작은 언니 집에 도착했다. 17살 이후로 함께 살아본 적 없는 언니와의 생활이 걱정되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젊은 여자 둘의 행복한 자취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것 같다. 


집에 대한 그리움보다 신기한 곳에 입성한 즐거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버스를 잘못 타면 이상한 곳으로 가버릴까 봐 지하철밖에 탈 수 있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스터디하러 가는 길에 지하철이 너무 예쁜 한강을 지나가는 것도 너무 신기했고, 드라마에서 보던 '홍대 입구'라는 곳에 지하철 타고 갈 수 있는 것도 너무 신기했다. 강남도 명동도 마음만 먹으면 편하게 갈 수 있어서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서울에 온 기쁨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던 그즈음에 엄마는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본가에 계속 있던 내가 떨어져 나가니 너무 서운하다고 했고, 허전하다고 했다. 나도 가족들 보고 싶다고 빈말 비슷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귀찮아졌다. 


종종 엄마의 전화를 놓치거나 씹었다. 공부하느라 바빴다며 무슨 일이냐는 메시지만 남겼다. 그러면 엄마는 보고 싶어서, 또는 뭐하나 해서. 하고 대답했다. 


그때는 엄마에게서 벗어나서 비로소 자유가 된 거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서울에 간다고 하니 토목 여학우 중 한 명인 남식이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나도 거기로 갈 테니 나도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작은 언니 집에서 생활하며 남식이 집 앞의 독서실에 함께 다녔다.


그렇게 남식이와의 신림 고시촌 독서실 생활이 시작되었다. 


공대여자 : 남식아 나 아이스 카페라테 먹고 싶어. 근데 매번 사서 마시면 너무 비싸겠지?
남식이 : 아이스 카페라테! 내가 만들어줄게 기다려봐.


남식이는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소량의 뜨거운 물에 녹였다. 그 컵에 독서실 정수기가 성실하게 만든 얼음을 넣었다. 마트에서 사 온 흰우유를 넣으니 카페에서 사먹는 것과 같은 아이스 카페라테가 만들어졌다.


남식이 : (똑똑) 공대여자야 5분만 쉴까? 콜?
공대여자 : 오 마침 졸리던 중! 콜!


5분만 쉬려고 했던 게 종종 10분이 되고, 그러다가 바로 점심 또는 저녁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오늘 고시 식당 메뉴에 고기반찬이 나올지 기대하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다.


공대여자 : 아 나 또 쪽지 받음. 발꿈치 들고 다니래. 이 정도면 무릎으로 기어 다녀야 하나?
남식이 : 야 진짜 숨도 못 쉬겠다. 징하다 징해.


남식이는 예뻐서 주는 쪽지를 진짜 받아보기도 했다. 나는 4년 전에 다니던 독서실보다 더 예민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신림동 독서실에서 호되게 음소거 트레이닝을 받았다.


공대여자 : 남식아. 일주일에 하루라도 쉬어가면서 하는 게 어때? 힘들지 않아?
남식이 : 이번에 못 붙으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니까. 쉬어도 마음이 편하지도 않고.


남식이 : 공대여자야. 이제 시간 안에 문제는 다 풀 수 있어!
공대여자 : 오! 역시 노력한 보람이 있었어. 오지다 우리 식이.


시험을 준비하는 7~8개월여 동안 남식이는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준비 기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짧은 탓이었다. 몸살에 걸려서 콧물이 자꾸 나는 바람에 독서실에서 코도 풀지 못하고 휴지로 코를 막고 공부했던 그녀였다.


공대여자 : 남식아! 나 드디어 면접 처음으로 간다!
남식이 : 꺅! 너무 축하해!! 그나저나 이러다가 공대여자가 먼저 취업해서 떠나면 나는 다시 혼자 …. 그래도 나는 네가 빨리 합격하면 좋겠다!


토익 점수만 겨우 만들고 상경했던 나는 퇴사 후 9개월 동안 매번 면접도 가보지를 못했다. 10개월 정도가 돼서 논술도, 인·적성 시험도 어느 정도 훈련하다 보니 면접을 보러 가기 시작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면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던 그때, 내 친구 남식이는 지방직 공무원에 합격해서 신림동을 떠났다. 


빵빠레를 먹으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질질 울었던 도림천과, 그녀와 갔던 고시식당과 문방구점이 너무 눈에 밟혀 나는 그녀가 없는 신림을 떠나 컵밥의 본고장 노량진으로 갔다.


나는 노량진에서 평생 겪어보지 못한 강추위를 겪게 된다. 벽을 보고 밥을 먹는 고시 식당의 월 쿠폰을 끊어 혼자 노량진 독서실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의 추위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겪어보지 못한 무엇이 있었다. 시골 쥐 공대여자는 노량진에서 취업을 할 수 있었을까?




상경해서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본가에 내려갔다. 자주 전화를 걸어 눈물을 흘렸던 엄마가 걱정되기도 했고, 집밥이 그립기도 했다. 아직 돈이 떨어지기 전이니 이럴 때 많이 가야지 싶었다. 


나는 항상 집에 손님으로 대접받아본 적이 없어서 본가에 놀러 온 나를 반겨주는 가족들이 어색했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갔더니 내 방이 없어졌던 게 몹시 놀라웠다.  분명 엄마는 나를 무척이나 그리워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동생 놈이 떡하니 내 방의 주인이 되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나는 할머니 방에서 꼽사리로 자야 했고 거실에서 주로 쉬어야 했다. 


엄마는 분명 내가 집을 떠나와서 속상하다고 했는데, 자꾸만 안 쓰는 짐을 정리하라고 한다. 


내 짐을 다 치워버리고 가지고 가버리면 내가 더 속이 상할 것 같아서 그 후 5년을 더 모른 척하고 지내고 있다.


온수 매트를 챙겨서 올라온 후로 쭉 서울에 눌러앉을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천천히 올라왔을 텐데. 손님이 되어버린 내가 우리 집을 생각하면 괜히 후회할 일만 떠오른다.


엄마는 그 후 인수 이모, 키다리 이모와 한 달에 5만 원씩 모으는 맛집 투어용 계를 만들었다. 심심한 건 아빠도 마찬가지인지 세 명이서 맛집 투어를 갈 때면 항상 운전해준다고 한다. 운전하는 대신 아빠는 회비를 면제받는단다. 다만 아빠는 운전해주는 노고보다 먹어 치우시는 양이 더 많아 엄마가 이모들 보기 민망하다고 했다. 


엄마와 에어로빅을 들었던 헬스장이 망해버리는 바람에 이모들은 단체로 다른 헬스장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엄마는 이모들보다 더 바빠져서 에어로빅 이모들은 어서 합류하라며 성화라고 한다.


엄마는 엄마 자리에서 나는 내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귀염받으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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