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mang Sep 17. 2020

압구정에 사는 사람 처음 봐요

서울 쥐가 된 시골 쥐(공대여자 말고 그냥 나)


서울에 취직하게 되었다. 불과 1년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내 서식지가 어느 지역 무슨 동네일지 인생의 대부분이 미지수였는데. 특별시, 그것도 서울특별시민이 되다니.


30년을 지방에서 살다 보니 내 말투에 별다른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다. 다만 표준어의 정의가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고 해서 친구들과 함께 적잖이 화가 났었던 기억뿐이다.


나름 "사투리 많이 안 쓰네?" 하는 말을 듣고 살아온 사람의 자부심이 있었다랄까.


그런데 문제는 억↓양 ↑이 확실하게 다르다는 걸 두 번째 직장을 구하면서 알았다.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아서 스터디 때마다 지방 출신인 사실이 쉽게 들통났고, 면접을 준비할 때 유의해야 했다.


각종 스터디의 구성원들은 거의 모두 서울에서 나고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한번은 아주 친해진 구성원들이 나를 마구 놀려댔다.


서울 쥐 1 : 공대여자 누나 말이 원래 그렇게 느려요?
서울 쥐 2 : 아니야. 쟤 사투리 들킬까 봐 저러는 거야. 킥킥킥
공대여자 : 아이들아, 본토 발음으로 욕 한번 먹어보겠니?


나는 말실수를 할까 봐 말 뒤를 의도적으로 흐리고 속도를 늦췄다. 이걸 알아차리다니 아주 여우 같은 놈들이었다. 그래도 취업은 내가 먼저해서 쌤통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다크호스 시골 쥐의 완승이었다.




1달간의 신입사원 교육을 마친 후 동기들은 각자의 부서로 발령받아 일을 시작했다. 입사 후 6개월이 지나니 신입사원들과 선배 직원들 간의 대화 및 친목 도모의 날을 갖게 되었다. 우리 조 동기들하고만 친하게 지내다가 몰랐던 동기들도 고루 알게 돼서 유익했던 걸로 기억한다.


동기들과 선배들은 고루 섞여서 몇 개의 조로 나뉘었다. 그 후 다양한 레크리에이션과 게임 등에 참여했다.


한참 활동적인 게임을 진행한 후 삥 둘러앉아 선배들의 리딩 하에 담소의 시간을 나누었다.


선배 한 분이 새초롬하게 앉아있는 동기 M에 말을 걸었다.

선배1 : M 씨, 어디 살아요?
M 씨 : 아, 네. 저는 압구정에 살고 있습니다.
선배2 : 압구정? 오 대단하다.
동기들 : 오 압구정 오(수군수군, 대박)


그전까지는 압구정이라는 단어를 드라마, 영화에서나 봤지 실제로 그곳에 살고 있다는 사람은 정말 처음이라 나는 너무 놀라서 말했다.


"세상에! 너무 신기하다! 저 압구정 사는 사람 처음 봐요! 어떻게 하면 거기에 살 수 있어요?"


선배들과 동기들은 하하하 웃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다시 생각해봐도 저런 질문을 왜 했는지 너무나 후회스럽다. 왠지 나의 질문이 백치 아다다같이 하얗게 보였을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나는 정말 너무 신기해서 물어본 건데. 나는 괜히 혼자서 그 동기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왠지 앞으로도 친해질 일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입사해서 처음 부서 발령을 받았을 때 작은 언니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작은언니 : 공대여자야. 너 회사 사람들이 어디 사냐고 물어보면 OO 구에 산다고 하지 말고 차라리 우리 동네를 이야기해.
공대여자 : 왜? 우리 OO 구에 사는 거 맞잖아.
작은언니 : OO 구에 산다고 하면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어.


예를 들면 강서구 말고 마곡동, 인천 말고 연수동, 영등포구 말고 당산동이라고나 할까?(아직도 그 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시골 쥐인 내 기준으로는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부서에 발령받고,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면 백이면 백 "어디에서 출퇴근하느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네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다. 언니 집에 얹혀서 살고 있습니다. 출퇴근은 자차로 하고 있어서 걱정 없습니다." 해맑게 대답했다. 대부분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입사 후 조금 더 지나서는 고향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처음에 나한테 어디 사냐고 물어보고, 동기들한테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게 진짜 순수한 의도인 줄 알았어. 출퇴근이 멀지는 않은지, 오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은지, 지금 이용하는 대중교통이 최선의 방법인지 알아봐 주려는 그런 거 말이야? 근데 아니더라. 조금 지나 보니까 그 눈빛의 차이를 알겠어. 좋은 곳에 사는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과 별로인 곳에 사는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의 차이 말이야."


옛날 회사 분들하고는 힘든 이야기, 가족 이야기, 취미 이야기, 연애 이야기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눴는데, 서울 사람들은 매일 집을 샀는데 얼마 오른 이야기, 누구 아들내미가 대학을 어디로 갔다는 이야기, 누가 주식을 했는데 어디를 추천받았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초등학교 때 할머니가 처음 서울 구경하러 가는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서울 가믄 코 베어 간다잉 눈 똑바로 뜨고 다녀라잉." 같이 간 친구들에게 "우리 할머니가 그랬다고야. 언능 코 잘 챙겨라잉." 했던 그때의 나를 떠올려본다.


할무니 나 이미 코가 없어진 것 같애.




팀장님 1 : 공대여자 ~ 출퇴근 어디에서 한다고 했지?
공대여자 : OO 역 쪽에 살아요. 운전해서 출퇴근합니다.
팀장님 1 : 어느 길 쪽으로 와? OO로 타고 오나? OO 교차로 지나서 오나? 거기보다 빠른 길 아는데 다른 길이 어디냐면 말이야 $%$%&$%$%&$%$%&$


드디어 순수한 목적으로 어디에 사는지 물어봐 주시는 팀장님이 나타났다. 그런데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시골 쥐 + 길치인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몇 주 후, 나에게 한 차례 새롭고 빠른 길을 설명해주셨던 팀장님이 다시 나에게 물어보셨다.


팀장님1 : 공대여자 ~ 저번에 내가 알려준 길로 잘 다니고 있나?
공대여자 : 아! 팀장님 요즘에는 그날그날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그냥 오고 있습니다. 이제 적응해서 출근 시간도 10분이나 줄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팀장님1 : 아하. 그렇구먼. 그럼 그 네비게이션은 OO로 타고 가라고 하나? OO 교차로를 지나가라고 하나?
공대여자 : (그걸 제가 어떻게..) 제가 시골 쥐라서요. ㅋㅋ 그냥 가라는 데로 가고 오라는 데로 오고 있습니다. 허허


시골 쥐라고 해버려서인지 팀장님은 내가 그냥 네비게이션 말을 듣는게 안전하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시골이라고 다 시골 쥐만 있는 게 아니고, 서울이라고 다 서울 쥐만 있는게 아니라는 걸 처음 느꼈다. 마음 따뜻한 팀장님 덕분에 관심받는 기분도 들고 좋았다.


시골 쥐 공대여자는 그 후로 그 동네에서 이사를 할 까지 꼬박 2년 넘게 매일 네비게이션을 이용했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른 살 딸과 엄마의 에어로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