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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Oct 24. 2021

숙제

사장이 되었다 1

얼마 전 아이가 받아쓰기 문장 카드를 가져오지 않았다. 뒤죽박죽 책가방 안에는 발명품 재료로 사용하겠다며 챙겨 오는 뽁뽁이, 종이 상자 등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있지만 숙제에 꼭 필요한 문장 카드는 보이지 않았다. 숙제는 해야 하는데, 문장 카드는 안 보이니 곤란한 표정을 짓던 녀석이 뜸을 들이다 말한다.


"엄마, 엄마가 다른 엄마들한테 물어봐주면 안 돼?"

"응, 안돼. 대신 핸드폰은 빌려줄게."


되도록이면 아이 삶의 주인 자리를 덜 넘보려 노력하는 편인데, 생애 첫 숙제의 준비물을 빠트린 난감한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 훼방 놓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공부방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아직 센터에서 하원 하지 않은 친구들의 가방 속 문장 카드를 사진으로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아이의 겸연쩍고 불편한 감정이 옆 자리에 앉은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우여곡절 끝에 숙제를 완성한 아이는 다음 날에도 문장 카드를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아이는 전화로 부탁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잠시 생각을 하더니 결심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일찍 가서 아침에 할래."


다음 날 아침, 아이는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등교했다. 출근해 계시던 선생님이 깜짝 놀라 물었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교실에서 자신의 숙제를 마쳤다.  

  

 

여기, 낡은 건물이 한 채 있다. 5 각형 모양의 독특한 외관을 지닌 시장통 육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올해 서른 살 된 3층 건물이다. 몇 해 전, 남편은 이 건물을 상속받았다. 상속... 누군가 죽어야만 형성되는 이 재산은 망자에 대한 감정과 기억의 무게를 더한 값이다. 숫자와 물건의 이면에 망자와 얽힌 자신만의 이야기로 수치로는 측정이 불가능할지도. 대체로 가족 간에 이루어지는 상속은 가족 관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깔끔할 수 없는 일과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상대를 다시 만날 수 없을 때, 남겨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혼자 되뇌는 무한 반복의 고리에 걸려든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순간들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다 결국에는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버릴 회한과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 생활 속에 갑자기 툭 튀어나올 때는 해결할 수 없는 막막한 그리움 고리를 뱅글뱅글 돈다. 인간은 모두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예고하고 있지만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남겨진 자들에게는 언제나 낯설다.  남편이 상속한 오각형 건물은 그것 그대로 회환과 그리움이며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부재였다.


어머니는 삼십 대에 남편을 보내고, 홀로 삼 남매를 키우셨다. 아버님과 함께 운영하던 가게를 혼자서 이끌며 나름의 사업수완으로 살림을 불려 나가셨다. 제사상 용품을 주로 취급하며 대목에는 장사 준비와 영업으로 잠 잘 틈 없이 일을 하셨다. 그 와중에 앞서 간 남편의 차례상 준비를 하려 동분서주하는 어머니를 보고, 아들은 '내가 아들이니 이제부터 우리 집에 제사는 없다'를 선언하였다. 먼저 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다. 자신들과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 뒤로 한 번도 아버님의 제사는 없었다. 

어머니는 시집 식구들과 친인척들이 있는 그 동네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른다. 그간에 모은 돈으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땅을 구하고, 생애 처음 건물을 올렸다. 어머니의 야심 찬 계획은 순조롭지 못했다. 반듯하지 못한 대지 모양에 올려진 건물은 네모반듯하지 못했고, 그마저도 계단과 화장실이 넓게 빠져 생활공간은 좁게 나왔다. 1층에는 당신이 운영할 상가, 2층은 임대, 3층은 가족이 함께 살 공간으로 구성하였으나 정작 건물을 세우고 당신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삼 남매를 사립대에 학자금 대출 한 번 없이 졸업시켰다. 늦은 밤까지 고된 장사일을 하는 어머니에게 큰 딸은 만기 된 적금 같은 존재였다. 책을 손에서 놓은 적 없는 수재, 훤칠한 인물, 부드러운 성품 등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큰 누나를 보고 자란 동생들 또한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잘 자랐다. 어머니는 그렇게 노년의 행복을 차곡차곡 저금하고 계셨다.


삶은 참 짓궂다. 이제 좀 살만하다 싶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반전을 일으킨다. 내가 시집온 3년 즈음 지난겨울 어느 날, 어머니의 심장이 돌연 멈추어버렸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일요일 오후의 장면은 도장이 찍히듯 지금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다. 모자를 눌러쓴 큰 누나는 작은 손으로 막내 동생을 꼭 받치고 있었고, 뒤이어 도착한 아들은 어깨가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가 젊음과 바꾼 만기 적금은 장례식의 화환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삼 남매는 아직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으나 장례식장은 그들의 슬픔과 상실을 위로하려는 친구들과 지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건물은 큰 누나에게로 상속되었다. 큰 누나는 한 번도 엄마의 부재에 대해 큰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냉장고 앞에 '엄마 철야예배 갔다 올게'라는 메모지를 붙여두었을 뿐이다. 냉장고 앞에 설 때면 저 문을 열고, 곧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은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보였다. 삼 남매는 엄마를 부르지 않았다. '엄마'라는 낱말은 시한폭탄의 뇌관과 같았다. 나는 그런 삼 남매를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 다루지 못한 상처가 어디로 어떤 방식으로 튀어나와 직면하게 할지 두려웠다. 그즈음 남편은 대상포진을 앓았고, 혈변을 누기도 하였다. 건강검진으로는 어떠한 병명도 없었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몇 년 지나, 우리에게도 새 가족이 생겼다. 여동생도 결혼하여 가족이 생겼다. 삼 남매 맏이였던 큰 누나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무언의 숙제들을 마친 듯한 홀가분한 어느 때였다. 그 해 1월, 그녀가 동생을 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남편은 수술동의서에 서명 날인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평소 관찰하던 큰 누나의 모습과 달라 무언가 불안하던 나도 뒤이어 연차를 낸 후 서울로 올라갔다. 저녁이 다 되어 도착한 병원 수술실 앞에는 시어른들이 와 계셨다. 너무 울어 눈이 보이지 않는 고모님들을 보고 알았다. 큰 누나의 병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렇게 남편에게 오각형 건물이 상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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