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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Mar 17. 2022

늙은 거리의 희망

좀비 같은 가게들 사이로 예비후보자는 활기가 넘친다

내가 운영하는 식당은 시장 사대문 밖의 좁은 육거리의 모퉁이에 있다.

오각형으로 생긴 건물은 가게 안에서 거리의 이모저모가 훤히 보인다.

육거리에는 지금도 끝자리가 2일, 7일인 날이면 장이 선다.

그렇다. 5일장이다.


약재가게 사장님이 사주신 호떡_커피와 함께 오늘의 점심

사대문 안으로는 상설시장으로 늘 가게들이 영업을 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중앙통에 위치한 가게들이나 손님 구경을 하지 골목 안쪽의 가게들은 빈 가게가 제법 많다. 그 시장의 골목길 하나를 차지한 '청년몰'은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사정이 어렵다. 구석진 골목길로 마음먹고 찾아가도 주차할 곳이 마땅찮다. 얼른 돈을 모아 이곳을 벗어나든지, 아니면 버티다 폐업을 하든지.. 그 사이들을 건너뛰는 선택을 해나가는 성공 케이스가 나오기란 참 어렵다.


사대문 안의 시장도 그런 마당에 시장통 옆에 붙은 이 거리의 사정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건물 리모델링 공사를 할 때에는 모처럼 거리에 활기가 있었던 것 같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분 좋은 막연한 기대감.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지길 바라는 희망.

그 희망이 가져오는 설렘.




안타깝게도 바라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12월 즈음부터는 지역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산하는 코로나로 가뜩이나 조용한 거리가 때로는 을씨년스럽기도 했다.


며칠 전, 맞은 편의 육거리 슈퍼 사장님이 폐업을 하셨다. 슈퍼라고는 하지만, 이 슈퍼의 주된 수입원은 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슈퍼 앞에는 만취한 손님들이 늘 두어 분은 앉아 있었다. 소비자 가격에 술과 주전부리를 먹을 수 있는 그곳은 고성과 욕설이 오가고 112 순찰차가 자주 출동하는 요주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가끔씩 슈퍼 사장님은 손님들의 심부름으로 식당에 시래깃국을 사러 오셨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사장님은 안절부절못하셨다. 사장님은 하지 않아도 되는 잔심부름을 대신하고도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무싯날에는 손님들의 잔심부름까지 대신해가며 소주와 맥주를 팔고, 장날에는 믹스커피 한 잔을 400원에 파셨다. 나름의 거리 특성을 파악한 전략적(!)인 영업과 부지런함까지 갖추신 사장님은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먼 거리의 집까지 걸어 다니기까지 하셨지만, 결말은 폐업이었다.



사장님의 폐업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가장 불안한 요소를 없애주었다.

슈퍼 앞의 의자에 앉은 만취한 손님들은 맞은 편의 내게는 은근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혼자 운영을 하다 보니 해가 진 뒤에 슈퍼에서 이미 술이 취한 손님들이 가게로 올 경우, 그들이 가게 문을 나갈 때까지 내 머릿속은 온갖 시나리오를 펼쳐놓고 대응전략을 세운다. 그 여러 날 들 중에는 나도 경찰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슈퍼 사장님의 폐업이 그저 좋지만은 않다.

이미 생명을 다 했다는 것은 알지만, 혹시 모를 기적을 누구나 꿈꾸듯,

슈퍼의 닫힌 셔터가 이 거리의 인공호흡기를 떼 버린 것만 같다.




무싯날에는 한산하여 정식 준비량을 줄였다.

한 무리가 들어와 반갑기도 하고 한산한 거리에서 신기하기도 하였다. 곧 있을 기초단체장 선거의 예비후보자와 그 선거운동원들이었다. 이튿날 장날에는 정당을 상징하는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한, 다른 예비후보자가 거리를 활보하였다. 며칠 전이었던 대선 기간에도 선거운동원들은 죽은 듯한 이 거리를 활보活步하였다.


먹고사는 일이 자꾸 생각과 멀어진다.

민생이라는 주장에 정작 먹고 사는 일이 담겨 있지 않다.

  

오늘 장에는 오랜만의 봄비가 푸짐하게 내리고 있다. 미처 다 팔지 못한 물건을 처분할 방법이 없는 난전 상인들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으신다. 점심영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식당 주변을 한 바퀴 산책해보면 곳곳에 공실이 보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의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간다.


이 늙은 거리에 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그 사이 틈으로 자신의 욕망을 내미는 사람들. 선거철마다 후보자들이 반드시 찾는 시장. 그 시장에서 그들이 건넨 자기 욕망의 그 너머로 희미하게나마 거리 위에 뿌리내리지 못한 희망들을 발견하기 간절히 바란다.




장이 서는 날이면 거리에 사람이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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