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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May 14. 2022

내가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축전처럼, 당당하게 당연하게

대학원을 복학한 지, 이제 2개월이 지났다. 입학하자마자 바로 휴학을 했으니, 신입생 첫 학기를 보내는 셈이다. 첫 수업에는 바뀐 건물을 찾느라 지각하고, 학내 와이파이를 이용하지 못해 종종 거리고, 출석 인증하는 앱을 사용하는 데에 서툴러 망신도 당하는 등의 이러저러한 소소한 에피소드를 지나왔다.


등교 첫날, 첫 수업에서 교수님은 수업 안내를 하시며 폭탄을 던지셨다.

"이 수업을 잘 따라오지 못하겠다면, 이게 나의 전공이 맞는가 잘 생각해보세요."

비전공자인 내게 교수님의 발언은 그야말로 '팩트 폭격'이었다.

알아요.... 나도 안다고요.. 내가 괜한 짓을 벌이고 있나라는 그 생각, 내가 더 많이 하고 있다고요.

 

몇 주전, 중간고사를 치렀다.

과장을 많이 보태자면, 거의 밤을 새운 것 같다. 학부 과정에 다루어지는 경제학 원론부터 미시, 거시경제학, 응용수학 등의 배경이 전무하다 보니 내용은 이해한다 하더라도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결정적인 결핍이 발생하였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초등 5학년 때부터 손절했던 수학이 나에게 '나야 나, 오랜만이야!' 두 팔 벌려 다가온다. 나는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 수학을 만날 자신이 없다는 게 문제다.   


무언가를 마구 적어내긴 했지만, 

나는 안다.

사실상 이것은 백지라는 것을.


시험을 마친 후, 수업을 함께 듣는 동료 선생님들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않아 보였다.

위로하듯 내게 건넨 말씀은

"다 그래요."

나는 안다.

물론 모두 시험이 어려웠겠지만, 시험을 수행한 후 잘/못을 평가하는 자기의 기준은 모두 다를 것이라는 것.

즉, 저 사람이 못 풀었다는 것과 내가 못 풀었다는 것은 천지차이라는 것을 말이다. 


꽤 의기소침해 있다가 정신을 좀 차렸다.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고, 스스로 선택한 과제이다.

잠시 헷갈렸다. 나는 학부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연구주제를 완성해나가기 위한 대학원에 입학했다는 것. 그들은 긴 시간을 들여 배경을 이루었을 텐데, 단 몇 주만에 뛰어넘지 못해 죽는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이와 일주일에 두 번, 영어 공부를 한다. 한 십여분 남짓이지만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재미없지? 그래, 꼭 재미로 하는 건 아니야. 근데 안 하면 나중에 네가 너 자신을 속이게 돼"

"응? 왜?"

"너는 생물학자가 꿈이라며. 생물학자가 되려면 해당하는 대학에 들어가야 돼. 영어는 기본이야. 당연히 연구에도 영어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거고. 근데 네가 영어를 못하면 네 꿈이 생물학자가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해. 그만한 노력을 안 해서 꿈을 바꿔버리는 거지. 너 스스로에게 생물학자는 그렇게, 꼭 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자신을 속이기 시작해."


아이에게 말하고 있지만,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재미있어서 즐겁기만 해서는 좋은 것도 얻어지는 것도 없다. 

밥상을 차리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밥 한 술 뜰 수 없는 당연한 이치를 잠시 잊었다. 수고를 거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자연의 그 어떤 것들도 가만히 있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밥상을 차리는 수고는 배재한 채 언급하는 '자연스럽게 살자'는 말은 어쩌면 상당히 왜곡된 말일지도 모른다. 고통을 배재한 삶이 가능하다는 접근은 그 자체로 이미 가장 인위적인 상태인 것이다. 




며칠 전, 수업을 마친 후 수업을 함께 듣는 동료 선생님들에게 교수님 험담을 했다.

공부가 힘들다는 앓는 소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후, 내내 그때의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이에게 어른이라며 건넨 충고, 글 속의 내게 다짐하던 말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춘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부끄러움이 명치끝에서부터 올라온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참 못났다.

나는 사실에 감정을 실어 현상을 왜곡하고 있다.


 

축전-탈피하며 성장하는 다육이



앞 가게 사장님이 안동 식당 폐업 선물이라며 아이에게 '축전'이라는 다육이를 선물해주셨다. 축전은 탈피를 하며 성장해 나간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아이가 도마뱀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계셔서, 맞춤 선물을 주신 것이다. 축전이 자라는 과정이 참으로 신비로웠다.

새로 올라온 잎(?)들은 기존의 잎이 바싹 말라가는 정도와 비례하며 오동통하게 자랐다. 토끼 모양 같기도 한 저 틈 사이로 새 잎이 봉긋 솟아나는데, 새 잎을 성장시키는 과정에 기존의 잎은 얇디얇은 껍질만 남을 뿐이다.   


나의 사실은 내가 인격적으로 그다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 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욕구를 가졌다는 것 등등이 있을 것이다. 축전처럼 겸허하게 당연하게 당당하게, 도달하고 싶은 나에 대한 사실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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