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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 Sep 28. 2021

섬에서 만나요

우리는 어제 처음 만났고, 오늘 헤어졌어요. 제주에서 하루를 함께 보낸 이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으로 느껴져요. 서로의 손과 손이 홍색 실로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아침 비요뜨를 결제해 준 얼굴조차 까먹은 편의점 사장님처럼 지나칠 수 있었으니까요. 간혹 우리는 서로의 삶 속에 작은 조연 정도로 자리 잡아 함께 영화를 만들어 가요. 우연이라고 하기에 그들은 제 삶의 굴곡이 오목하게 들어가 있을 때 이따금 나타나 필연이란 이런 걸까 생각하게 해주어요. 마침 이 사람이 필요했는데, 뿅 하고 나타나고 스르르 사라져요. 오늘은 그들 중 곶자왈에서 요가를 나누는 선생님에 대해 써보려고 해요.  





_

겨울

꽝꽝 언 마음을 하고 제주에 내려왔어요. 서울도, 고층 빌딩도, 사람도 그저 다 질려버렸던 때였지요. 열흘간 무계획으로 머무르려 하늘을 건넜던가요. 얼굴을 할퀴는 바람을 등지고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롱패딩을 입고 왔을 텐데, 멋 좀 부리겠다고 코트를 입었었네요. 핸드폰을 쥔 손이 부끄러울 것도 없는데 새빨개졌어요. 점점 무감각해지는 손을 입김으로 후후 불어가며 텅 빈 아스팔트 길을 걷고 또 걸었어요.


 오들오들 떨며 요가원의 나무 미닫이문을 드르륵 밀었더니, 평온한 두 미소가 눈에 들어왔어요. 길을 헤매며 생겼던 긴장이 증발하고 온기를 머금은 찻잔이 손의 감각을 되돌려주었어요. 꽁꽁 얼어붙었던 제 마음도 서서히 녹아   내리더라고요.


열흘 내내 요가만 했어요. 제주 서쪽 시골의 이곳, 이 안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들에게 마음을 홀라당 빼앗겼거든요. 요가원 뒤쪽에 있는 치유의 숲, 걷기 명상을 위한 소망 지도, 동백 핀을 꽂은 나무와 귓가에 울리는 새소리까지. 그리고 이 공간을 지키고 계신 두 선생님에게요.


그 겨울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저는 아침부터 얼굴에 아쉬움을 그리고 있었어요. ‘마지막’ 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니 오늘이 정말 선생님과의 끝일 것 같고, 어쩌면 이렇게 바람처럼 지나가는 인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때 선생님이 말했어요. 종종 연락하고, 다시 만나면 된다고. 야무진 다짐을 하며 저도 입을 앙물고 단어를 뱉었어요.


“다시 만나요. 또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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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옷차림이 가벼워진 7월에는 백팩 하나를 등에 지고 다시 제주를 찾았어요. 빨간 오두막의 앞 마당을 가꾸는 선생님의 모습이 저 멀리서 보이는데, 어찌나 반가웠는지. 신이 나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한걸음에 언덕을 뛰어넘어 선생님들에게 포옥 안겼어요.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여름의 이별은 조금 쉬웠어요. 다시 왔으니까, 또 오면 되니까요. 겨울에 와야겠다는 작은 마음을 먹으며 말했어요.


“다시 만나요! 또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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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지금은 제주공항에서 김포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태풍이 제주를 훑고 한가위가 스쳐 갈 즈음 하늘을 건너 이곳으로 왔어요.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지요. 곶자왈 요가원에서 하는 1박 2일 리트릿을 하고 제주에 조금 더 머물다가 육지로 가는 길이에요. 이제는 이별이 두렵지 않아요.


어제는 이렇게 말하고 서로의 평안을 소망했어요.


“추워지면 또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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