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맛이 있다. 싫어했던 역사가 길어 그 이유를 모르는 것들이 있다. 토의 토를 달며 다수의 취향과 사뭇 다른 나의 입맛에 부연 설명을 첨가하는 모습은 어딘가 구차하다. 그럴 땐
“알레르기 있어요.”
흩어지는 말들을 하나로 일단락 짓는다.
혀 위의 남은 단어들을 꿀꺽
삼킨다.
삼켜버린다.
삼켜서 버려졌다.
유난히 유난스러운 취향을 가진 나는 사람들의 반쯤 찌푸린 눈썹과 피어나는 호기심을 꿋꿋하게 대면한다. 오이 꼭 빼주세요! 김밥 한 줄의 주문에 간절한 외침을 더한다. 오이와 같이 호와 불이 극명한 재료는 설명을 첨가하지 않아도 되어 간편한 축에 속한다.
케첩은 장난감 맛이 나고, 카레 향은 코끝을 찡하게 찌른다. 김치찌개는 좋지만 김치는 싫어하는 나를 어떡하나. 식탐이 많은 친구는 나와 먹는 급식을 좋아했고, 잔반 없는 수요일에는 꼼수 대마왕이 되었다. 단체로 식사를 하러 가면 종종 메뉴로 참석 여부를 결정했고 자주 배가 아팠다. 속이 안 좋다는 말을 뱉고 나니, 거짓말처럼 아랫배가 슬슬 아려온다.
서브웨이에서 ‘플랫브레드에 터키요’로 말문을 잘 트지만, 사람들이 열광하는 그 버거와 그 버거가 대화 도마에 오르면 입을 꾹 다물었다. 일상의 위로라던 버거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니. 누군가는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보내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 생에 햄버거를 입안으로 들인 날은 총 2번이나 된다. 음. 씹어 먹기보다는 삼켜서 목구멍을 타고 넘겼다. 위 문장을 쓰면서도 약간은 버거운 버거의 맛이 식도에 고이지만 햄버거 애호가인 친구 옆에 앉아 케첩 없는 감자튀김에 아이스크림을 자주 먹는다.
급식실은 학교 내 보이지 않는 서열을 공간화 한 곳이었다. 몇 달 일찍 태어난 3학년은 늘 빨리 먹었고, 선생님은 우리도 3학년이 되면 뜨끈한 반찬을 먹게 될 것이라는 말로 말문을 막았다. 그들 중에서 소위 일진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개중 가장 뜨끈한 밥을 먹고, 잔반 쓰레기통 앞에서 다른 학생들의 남은 반찬을 관리·감독했다. 학생들이 얕보지 않을 잔반 감시대로 적합하다는 노랑머리들은 급식실의 공기에 긴장을 두어 스푼 더했다. 수북한 잔반으로 뒤덮인 급식 판을 들고 줄을 서면, 돌아가서 다시 먹으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러면 남은 음식물을 교묘하게 친구들과 나누어서 부담을 덜어냈다. 잔반 감시대의 눈을 피해 무사히 쓰레기통으로 골인하고 급식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3학년이 잔반 감시대로 있을 때가 차라리 나았다. 친구의 남자친구였던 권모 씨가 자주 눈감아 주기도 했고, 슬렁슬렁 허술한 3학년의 눈을 피하는 것쯤은 난이도 중하에 해당했다. 어느 날부터 3학년 부장 선생님이 잔반 감시대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나는 짧아진 교복 치마와 두 귀의 피어싱은 들켜도, 잔반만은 은밀하게 숨기고 싶었다.
그냥 알레르기 있다고 할 걸.
단순히 편식을 한다기에는 남들이 열광하는 음식들을 먹지 않는 사람이라, 그로 인해 겪는 다소의 곤란함은 익숙했다. 함께 먹는 이들과 그들의 입이 있었기에 나는 자주 허기졌고, 그 허기는 견딜 만했다. 문제는 약간을 넘어선 관심과 집단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식사 자리였다. 특히 메뉴를 하나로 통일할 때. 나에게는 나의 마음보다 더 커다란 용기가 필요로 했다. 악과 최악 사이에서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었다.
새내기 때 들어간 연합 동아리의 기억나는 모임은 중국집이었다. 21살인 선배가 20살인 나에게는 꽤나 커다란 존재였고, 우리는 동그란 원형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었다. 메뉴판을 보기도 전, 인원수 대로 짜장면을 시키겠다는 동아리장의 말을 들었다. 나의 마음은 두 개의 선택지에서 핑퐁을 치며 결국 조심스레 동아리장에게 다가갔다. “저는 볶음밥이요.”
‘짜장면을 눈앞에 두고 속이 안 좋다는 시늉을 할까’의 핑과 ‘볶음밥을 시키고 짜장을 안 먹는 이가 겪는 눈초리’의 퐁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 참. 나는 애초에 중국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짬뽕 전문점 수저가의 짬뽕은 예외로 해두자) 볶음밥도 딱히. 짜장 이불을 덮은 볶음밥이 나오면 나는 한숨을 삼키며 짜장의 침투를 받지 않은 보슬보슬한 밥알을 찾아냈다.
회사 사람들은 순대 국밥과 햄버거를 좋아했다. 다이어트 중이라고 둘러대면 1초 만에 다이어트라는 단어를 향한 안경을 끼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이야기만은 듣기 싫어 그냥 먹지 않는 음식이라 따로 먹겠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그냥 알레르기 있다고 할 걸.
여전히 나는 햄버거는 안 먹고, 순대 국밥집 근처에도 안 가며, 여러 음식을 안 먹는 사람이라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의 사람들은 굳이 묻지 않는다. 그들 앞에서는 알레르기를 운운하며 호기심과 오지랖 그 언저리의 시선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 왜 안 먹냐며 추궁하지도, 이 맛을 모르는 네가 안타깝다는 눈빛을 발사하지도 않는다. 긴 설명도 필요 없다. 예전부터 안 먹었고, 앞으로도 안 먹을 것이라는 뚝심을 나보다 더 잘 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파전보다는 김치전을 선호하고, 신전 떡볶이보다는 엽기 떡볶이를 좋아한다. 가끔은 내가 덜 좋아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그가 덜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서로가 악과 최악에서 선택하지 않도록 여러 후보를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