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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 Sep 14. 2021

최종_최최종_찐최종_진짜최최최종

마감 능선을 따라 걷는 사람

 넷플릭스 서사의 호기심을 이겨내고, 단정한 활자를 읽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잠을 만나기 위한 야무진 다짐 없이도 자연스러운 숙면을 취한 8월의 어느 월요일. 은은한 스탠드를 끄지 않고 깊은 잠에 취한 보기 드문 날이다. 에어컨 바람의 냉기에 이불을 휘이 소중하게 감싸던 그 날 언저리가 기억이 난다. 잠과 나 사이를 설명하자면 일방적으로 내가 매달리는 쪽에 가깝다. 주로 내가 그를 찾아가 오늘은 함께해도 괜찮을지 간절하게 청한다. 아주 간혹 그 친구가 나의 문을 먼저 똑똑 두드릴 때면, 나는 무방비 상태로 그의 세계에 흠뻑 빠져든다. 그 월요일 밤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푹 고아진 잠의 냄새가 난다. 밖은 벌써 새파랗고 풀벌레 소리가 볕과 함께 문턱을 넘어선다. 알람은 울리지 않았고, 송장 자세로 누워있는 나는 기분 좋은 개운함을 느낀다. 잠과 함께 긴 요가 수련을 마치고 사바아사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평소라면 핸드폰을 더듬어 뮤직 앱에서 mystery of love를 재생하고, 같은 노래를 여섯 번쯤 듣다가 겨우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날의 나는 푹 눌러쓴 모자로도 감춰지지 않는 입꼬리를 머금고 세상의 아침으로 나왔다. 화요일 오전 8시, 바지런한 사람들은 이른 시각부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행렬을 따라 홍제천을 거닐다가 매뉴팩트 커피 오픈 시간에 맞춰 방향을 틀었다.


 콜드브루 한 잔을 마시고 옆 가게에서 베이글에 크림치즈까지 품에 안은 날. 하루에 두 번의 외출은 피하는 나인데, 해가 달에게 자리를 건네줄 즈음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과거의 내가 솟아오르는 용기에 저질러 버린 에세이 수업을 수습하는 날. 아 왜 신청했지? 물살을 타고 몰려오는 걱정에 숨을 곳을 찾아보지만, 이미 해방촌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뒤였다.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 삶을 조명하는 그날을 그려보았다. 수업 가기 전에 스토리지북앤필름에 들리고, 이왕이면 눈에 들어온 책을 한 손에 쥐고, 룰루랄라 해방촌을 걷다가 에세이 스탠드 수업에 무사히 도착. 설마…자기소개를 할까? 


 그 설마만 얼렁뚱땅 해냈다. 미리미리 인간이 아닌 나는 겨우겨우겨우 늦지 않게 수업에 도착했다. 내가 알던 해방촌이 아니라 1차 당황. 끝도 없는 내리막길에 2차 당황. 워크룸 입구를 찾지 못해 3차 당황을 마친 후에야 말이다. 이곳의 언덕은 책방을 향한 오르막길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책방을 탈 때는 허벅지가 제 기능을 한다면, 이날은 뒤꿈치에 힘을 바짝 주어 가까스로 내리막길을 통과했다. 워크룸은 내가 아는 책방에 내가 모르는 비밀 공간 즈음 될 줄 알았는데, 음 다른 곳이었다. 태재님의 인스타그램에서 보던 파란 벽지를 안내 삼아 아슬아슬한 지하 계단을 밟았다. 호그와트의 땅굴처럼 이 곳도 책방과 연결되면 좋겠다. 땅굴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나는 마감 능선을 따라 걷는 사람이 되었다.


 글감을 받고 글을 쓴다. 초고를 쓰고 문장을 읽는다.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쓴다. 단어를 다듬으며 생각을 정돈한다. 흰색은 종이며, 검은색은 글자요. 읽으면 읽을수록 점진적으로 내 자모가 구려지는 것만 같다. 징글징글한 내 문장들을 읽으며 자아도취에 빠졌다가 극심한 자기검열을 한다. 생에 첫 에세이를 마감하며 나는 앗 차가운 냉탕과 으 뜨거운 온탕을 넘나들었다. 


 이슬아 작가는 거의 모든 에세이집에서 약간의 징그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징그러운 나와 징그러운 내 문장을 견디며 계속 쓰다 보면 멋진 글과 징그러운 글이 섞인 책이 완성된다는 그 말에 속아 보기로 했다. 멀미 나는 내 문장을 견디다 보면 조금은 이불킥을 덜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멋진 문장을 쓰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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