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냄새가 난다. 검은색도 갈색도 아닌, 빛을 잃어 색을 빼앗긴 모습이다. 해리포터에서 사람의 영혼을 빼앗아 먹는 디멘터가 내가 자는 사이에 왔다 간 모양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생생하게 살아있던 룸메이트가 하루아침에 공기를 내뿜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이 죽음의 첫 목격자가 되었다. 어쩌면 용의자일 수도 있겠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언제부터 였을까. 어질러진 방을 치울 기운이 없던 내가 참 무심했구나. 시들시들 말라비틀어진 잎은 간신히 줄기에 매달려 있다. 큰 목소리로 도움의 손길을 뻗었을 텐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도 찰나의 순간은 아니었겠다. 그러면 이 생명의 죽음은 어느 시점으로 선고해야 하나. 목격자가 죽음을 마주한 시점? 혹은 숨통이 끊어지기 일부 직전이었던 그 시각. 나의 첫 반려 식물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 “2월 22일 23시 45분, 사망하셨습니다. 미안해요.”
나의 지구는 소행성과 충돌하여 쉬이 중심을 잃고 맥이 떨어지곤 했다. 파란 바다와 녹색의 풀들이 사(死)를 한 번 그리면, 생(生)을 다시 그리는 일이 어려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반려 식물이다. 다른 생명과 함께하면 내 손에 쥐인 생명 줄을 조금 더 소중하게 부여 잡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기대였다. 더해진 생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깔려 뭉게지는 것이 아니라, 타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식물과의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 첫 룸메이트를 떠나 보내고 나는 새 룸메이트를 만났다.
현재 연희동에서 동거 중이며 이름은 ‘테라’인 친구와의 첫 만남은 이러했다. 양재 꽃 시장이었다. 모든 것이 죽어 있는 명동 한복판과 달리, 초록의 엽록소를 지닌 생명들이 서로 활기찬 에너지를 뽐내고 있었다. 키가 크고 덩치도 큰 개업 선물 같은 식물들 사이에서 나는 아담한 몬스테라를 골랐다. 그렇게 나의 품에 안긴 테라는 임시 보금자리였던 플라스틱 화분을 떠나 토분에 자리 잡아 더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다. 테라는 기존에 있던 줄기를 두 개로 갈라 새로운 길을 보여주더니, 어느새 동글동글 말려있는 잎을 선물해 주었고, 그 잎은 서서히 펴져 하트 모양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어느 늦 봄. 테라는 공중에 뿌리를 내렸다. 본디 땅으로 하강하여 정해진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 친구는 그 순리를 거슬러 원하는 곳에 새로운 뿌리를 내렸다. 당시 나는 내가 나고 자란 판교에서도, 도서관을 오르내리던 신촌에서도, 그리고 잠깐의 회사인이었던 명동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새롭게 뿌리 내릴 곳을 찾아도 된다고. 기존에 뿌리라고 생각했던 그 토양에서 벗어나도 괜찮다고.
그 어디에도 뿌리 잡지 못한 나는 공중 뿌리를 내리기 위해 하늘을 통과해 제주로 갔다. 저지리라는 예술인들의 마을에서 집보다도 집 같고, 영어로는 house가 아닌 home에 가까운 공간을 만났다. 네 명이서 거주하는 이 홈에서 나는 레이지 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성실하게 풀 냄새를 맡았으며,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닥뜨렸다. 게스트하우스보다는 게스트 홈인 곳이었다. 게스트도 하루만 지나면 호스트가 되는 공간이다. 게스트 홈 사장님의 똥땅거리는 기타 소리에 느지막이 일어나, 치유의 숲에 위치한 요가원에서 요가를 하고, 근처 책방에서 책을 구경하곤 했다. 단순하고도 충만한 이날들을 저지리의 한 게스트 홈에서 보냈다.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이 곳을 다시 찾았으며 다가올 가을에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한 뿌리는 육지에, 공중 뿌리는 섬에 두며 본디 하강하는 뿌리에 벌레가 꼬이면 공중 뿌리로 시선을 돌려 영양분을 찾는다.